Column

「임신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제한하고 있어 침해의 최소성을 갖추지 못했고 태아의 생명보호라는 공익에 대해서만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우위를 부여해 임신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침해했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소원에 대한 판결의 한부분이다. 헌재는 낙태죄에 대해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고 2020년까지 법 조항을 개정하라고 명령했다. 낙태죄를 둘러싼 논쟁은 두 인권에 대한 입장의 차이이다. 인간으로서의 태아의 생존권을 보장해야 할 것인가, 사회적 인간으로서 출산과 양육이 곤란한 여성의 사회적 생존권을 보장할 것인가라는 엄마와 아기가 다툰 재판이었다. 어느 것도 쉽게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물론 무책임하고 문란한 쾌락의 결과를 낙태로 결론짓는 것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자. 적어도 하룻밤의 쾌락을 위해서 아기를 죽여도 된다는 것은 아닐 테니까. 낙태죄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무분별한 낙태를 찬성할 리는 없을 것이다. 일본의 경우 낙태는 원칙적으로 불법이지만 임신부의 중대한 생명과 건강상 문제, 성폭행에 의한 임신, 태아의 장애 사유 등에 한해 제한적으로 낙태를 불법에서 제외로 한다. 고민의 흔적이 보인다.

 

헌법재판소 판결이 이 문제에 대해서 완전하고 명확하게 해답을 내려 준 것은 아니다. 2012년에는 합헌이던 것이 2019년에 헌법 불일치가 되었다. 세상은 생명윤리에 대해서 방황하고 있고 가치의 해석 또한 가변적이다. 헌재는 임신한 여성의 낙태가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라고 했고 태아의 생명보호는 공익이라고 했다. 그래서 공익보다 개인의 결정권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원론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공익을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위해 공익을 증진해야 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태아의 생명보호를 공익이라고 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태아를 공장에서 생산하는 계란으로 생각하지 않은 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인권은 말하면서 태아의 살 권리라는 인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결론지을 수는 없다. 내가 낙태죄 옹호론자라서가 아니다. 변호의 기회가 없는 태아측에서 보면 이치에 맞지 않다. 여성이 출산의 도구가 아니듯이 태아의 출생의 목적도 공익이 아니다. 임부에게 있어서나 태아에게 있어서나 순수하게 살 권리에 대해서 다투어야 한다.

 

낙태가 죄가 되는 사회에서 아기를 낙태해야하는 죄책감과 법을 어기는 양심을 이겨내지 못하는 여성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면서 아기를 낳아서 길러야 했을 것이다. 환경은 불우하였을지 모르나 생명은 보존되어 아기는 태어났을 것이다. 엄마의 희생으로 아기는 태어났다. 반면에 낙태를 해도 죄가 되지 않는 사회에서 여성은 희생하지 않아도 된다.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전제는 태아의 희생이다. 그러니 어떤 경우라도 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한다. 이것이 함부로 찬성과 반대를 말하지 않는 이유이다. 희생의 원동력은 사랑이다. 사랑이 없는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폭력과 다름아니다. 사순절에 낙태죄를 다루면서 희생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 공교롭다.

 

간통죄는 이미 폐지된 바 있다. 그것 또한 성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강조된 결과였다. 자기 결정권의 강화로 낙태죄도 곧 폐지될 것이다. 바람피울 것을 결정할 권리와 아기를 뗄 것을 결정할 권리가 생겼다. 나쁘지 않다. 법은 최소한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나 자유와 권리는 책임을 동반한다. 간통죄 폐지로 희생되는 가족에 대한 책임, 낙태죄 폐지로 희생되는 태아의 살 권리, 그 책임을 고려하지 않는 권리 신장은 반대한다. 법은 최소한이라는 자기 분수를 지켰다. 법은 최소한의 불행을 막아낼 수 있지만, 최대한의 행복을 만들어 줄 수는 없다. 그리고 공은 우리의 윤리의 책임으로 넘어왔다. 무엇을 결정한다는 것은 더 무거워졌다. 그리고 그 결정에 책임을 져야 한다. 간통죄와 낙태죄가 폐지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해도 된다고 생각해 버린다. 그러나 법의 의도는 그렇지 않다. 그것이 법으로 금지할 일이 아니라는 것뿐이다. 불가피한 임신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을 위해서, 이미 형성된 한 인간으로서의 태아의 삶의 권리에 대해서 교회와 사회는 사랑의 자기 결정권을 더 강화해야 한다. 낙태죄 폐지가 기정사실이 된 이상 기독교 윤리는 무조건적 반대보다 이제 바뀐 조건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생명과 그 살 권리에 대한 고민을 계속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