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요한계시록 2:1~11
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2: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2: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일곱 교회에 관한 이야기 중 가장 먼저 에베소 교회 이야기가 나옵니다. 에베소는 대도시의 세속적 환경에서 복음과 교회를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자칭 사도라 하는 가짜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냈다」고 했습니다.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영적 분별력과 맺고 끊는 과단성까지 보여줍니다. 에베소 교회는 신학적인 중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윤리적으로도 세상과 구별되어 도덕적이고 영적인 순결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부지런해서 예수님은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며 그들의 인내와 성실까지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에도 책망받을 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으니 그것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숙제는 에베소 교회가 잃어버렸다는 처음 사랑이 무엇인지 찾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신학적 중심을 가지고 있었고, 공동체도 잘 정비되어 있었고, 윤리적으로도 타락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잘 지키고 있었습니다. 우리 중에 만약 누군가가 신앙을 잃었다가 다시 회복했다면, 아마도 에베소 교회의 칭찬받는 점들을 되찾는 것을 회복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지식을 알아가고, 예배와 봉사를 하고, 성실하고 경건한 생활을 회복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것들을 이미 잘하고 있는 에베소 교회가 잃어버렸다는 것은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외적인 평가로는 알 수 없는 본질적인 신앙의 동기와 삶의 방식을 포함하고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에베소 교회가 칭찬받은 것의 양면성의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잘하고 있다는 것은 신학적이고 조직적이고 규범적인 것이었습니다. 물론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감사에서 나온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헌신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기계적인 시스템으로 변질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방법을 동원하면 믿음이 없이도 조직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물론 신학과 조직과 체제는 다 중요하지만 그것이 에베소 교회의 신앙의 온도를 식게 했을 것입니다. 틀린 것에 대해서 방어적으로 지킬 수는 있었지만, 옳은 것을 적극적으로 증명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요구하십니다. 이는 학문적, 사회적, 윤리적, 종교적, 조직적 요소는 물론 중요한 것이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행위는 이 관계에서 비롯되는 삶의 변화입니다. 이어지는 서머나 교회에 대한 평가에 힌트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서머나 교회에는 책망이 없습니다. 일곱 교회 중 서머나와 빌라델피아 교회만이 책망이 없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에베소 교회만큼 체계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약해 보이고, 고난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충성은 적어도 에베소 교회의 칭찬받는 점을 본받으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신학, 체제, 조직, 규범과 같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조직체로 정비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무엇입니다. 「처음 사랑」이라고 했기 때문에 우리는 「처음」이란 말에 집중하지만, 잃어버린 것은 처음 사랑이든 나중 사랑이든 틀림없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열심을 내어 회복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에베소가 칭찬받았던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회복할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사랑을 찾는 실마리는 형제에 대한 사랑입니다. 대외적으로 분석력과 분별력이 있었지만, 내부적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따뜻함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는 복음 전파의 동력과 영혼 구원의 사명을 상실합니다. 형제를 사랑한다는 체온을 잃은 교회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신앙의 온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학문과 조직, 규범으로 체제화되고 나면, 정작 사람은 사각지대에 놓이게 됩니다.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존재이유를 상실합니다. 회복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