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3:14~22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3: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미지근하다는 표현으로 책망을 받았습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라는 지역은 인근 온천지의 영향을 받아 온천수가 섞여서 석회질의 희고 미지근한 물이 개울에 흘렀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냉장 기술이 없던 시절에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미지근한 물이 지겨웠습니다. 더울 때 마시는 미지근한 온천수는 내뱉어내고 싶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 미지근함을 토하여 내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이 미지근함으로 비유된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그 다음절에 나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7」 그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마땅한 신앙의 온도를 미지근한 지점으로 끌어내린 것은 경제적 부유함, 다시 말하면 먹고살 만하다는 안정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실상 부유한 것이 아니고 가난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먹고살 만한 경제력에 의지하여 안심하고 사는 그들의 정신이 가난한 것이고, 비참한 것이고, 불쌍한 것이고, 그것은 마치 눈먼 사람 같은 것이고, 벌거벗은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뜨거운 물을 찬 그릇에 부으면 물은 곧 미지근해질 것입니다. 내면에 뜨거운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세상이라는 외면의 온도에 타협하고 동화되다 보면 하나님에 대한 뜨거움이라는 절실함은 식어버리게 됩니다. 외부의 온도에 따라 자신의 온도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지근함은 비겁과 동의어라고 생각합니다. 미지근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 미지근함이라는 것이 상대적 온도이기 때문입니다. 차가운 사람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자신의 온도가 더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다니고 있으니 구원을 받은 것이고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르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소망은 있습니다. 예수님은 18절에서 극복할 수 있는 세 가지 권면을 주십니다. 첫 번째, 불로 연단한 금이라는 것은 불순물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금광석을 제련하는 과정은 전부 고통입니다. 채굴하고 나면 가루를 내 버립니다. 그다음에 중력 분리로 정신없이 돌려서 금만 남깁니다. 그 후에 1000도가 넘는 온도에 녹여 불순물을 제거합니다.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지나면 순금만 남습니다. 껍데기를 치장하여 남에게 보여주는 도금 인생은 믿음의 순도를 가질 수 없습니다. 두 번째, 흰옷을 입는다는 것은 인생의 노력으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에 빨고 불에 태워도 죄는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 구원의 방법 말고는 인생의 수치를 가릴 수 있는 구원의 방책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라오디게아는 프리기안 가루(Phrygian powder)라는 재료를 사용하여 안약을 제조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자기 안에 갇혀있지 말고 눈을 씻고 분별하여서 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안락함에 늘어져 있어서는 영적인 경험과 성장을 할 수 없습니다. 치열하지 않고 고상하게 믿는 방법은 없습니다. 용기를 내서 일어나 도전하지 않으면 라오디게아는 영적 침체와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은 믿지 않은 사람을 영접시킬 때 제시하는 말씀이 아니고 믿음이라는 무늬로 도금한 채 경제적 포만감으로 뒤뚱거리는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3:1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