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32-42
10: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10: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10: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10: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늘
10: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10: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10: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10:39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10:40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10:41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10:42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세상의 수많은 우상들을 섬기는 종교들과 이단들 속에서, ‘신성모독’이라는 단어는 참 편리한 단어입니다. 자신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것, 또는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자들을 향해서 ‘신성모독’이라는 단어 하나로 그들을 간단하게 배척하고, 정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민족 신앙인 유대교에서 ‘예수’라는 존재는 너무나도 거슬리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자신들이 정립해온 율법을 부정하고, 오히려 정죄하며 다른 것을 가르치기 까지, 심지어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마치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처럼 말하기 까지, 이러한 종교적인 이유로도, 정치적인 이유로도 유대교의 지도자들 입장에서 예수라는 존재는 반드시 배제해야만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가장 직관적이고 현실적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신성모독’이라는 죄를 씌우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유대인들, 그리고 유대교 지도자들은 알지 못하였지만, 성경을 받아 읽는 우리들은 분명히 아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바로 그들이 지키려 하던 ‘신성’ 그 자체인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성모독’이라는 행위로 예수님을 제거하려 하는 ‘신성모독’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이 신성모독을 하고 있다며, 자신의 신성이 모독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성모독이라는 죄가 얼마나 무겁고 큰 죄인지를 알고 있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이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 했던 것과 같이,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즉결 심판하셔도 이상하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직 그 분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이 모독보다도 훨씬 큰 것,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여겨져야만 하는 사명이 예수님께는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들의 신성모독의 절정인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신명기 말씀에서는 누구든지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입장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죄인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의 위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이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행하고 있으니, 용서하여 달라고.
예수님은 이 땅에 신성모독을 하고 있는 그들을 구하고, 용서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 모든 모독과, 모독의 대가를 자신이 받아내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더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스스로 모독당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신성모독’이라는 죄를 저지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면서도, 마치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 우리의 얕은 생각 속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가두어 버리는 것, 그 외에도 수많은 일들로 우리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만 같은 죄를 짓고 살아가고는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서 십자가에 달리는 일이 없도록,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나님을 위해 그러한 모든 모독을 견디신 의를 우리에게 넘겨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삶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 모습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