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16:36~50
16:3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6:37 너는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을 명하여 붙는 불 가운데서 향로를 취하여다가 그 불을 타처에 쏟으라 그 향로는 거룩함이니라
16:38 사람들은 범죄하여 그 생명을 스스로 해하였거니와 그들이 향로를 여호와 앞에 드렸으므로 그 향로가 거룩하게 되었나니 그 향로를 쳐서 제단을 싸는 편철을 만들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표가 되리라 하신지라
16:39 제사장 엘르아살이 불탄 자들의 드렸던 놋 향로를 취하여 쳐서 제단을 싸서
16:40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물이 되게 하였으니 이는 아론 자손이 아닌 외인은 여호와 앞에 분향하러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함이며 또 고라와 그 무리같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여호와께서 모세로 그에게 명하신 대로 하였더라
16:41 이튿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가로되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 하고
16:42 회중이 모여 모세와 아론을 칠 때에 회막을 바라본즉 구름이 회막을 덮었고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났더라
16:43 모세와 아론이 회막 앞에 이르매
16:4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6:45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 하시매 그 두 사람이 엎드리니라
16:46 이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향로를 취하고 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두어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셨으므로 염병이 시작되었음이니라
16:47 아론이 모세의 명을 좇아 향로를 가지고 회중에게로 달려간즉 백성 중에 염병이 시작되었는지라 이에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16:48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에 염병이 그치니라
16:49 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염병에 죽은 자가 일만 사천 칠백 명이었더라
16:50 염병이 그치매 아론이 회막 문 모세에게로 돌아오니라
하나님은 고라의 반역을 심판하셨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고라의 죽음의 이유와 의미를 해석하려고 하지 않았다. 모세를 원망하고 그러한 논리의 확신에 차서 적대했고, 여론과 군중심리에 포획된 사람들은 웅성거리고 수군거리며 불만과 음모를 전염시켰다. 진실이 무엇인지 모르고, 호도되고 선동된 사람들은 여전히 혐오와 분노에 차 있다. 그러나 살아남은 인간들은 고라 일당의 죽음의 이유를 생각해야 했을 것이다. 민수기의 16장의 세계는 기만과 오해, 혐오와 악다구니로 피범벅이 된 세계였다.
「리트릿센터・이토」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왔다. 도쿄와는 다른 자연 속에서 평소보다 느긋한 아침 시간을 보냈다. 일행들은 이구동성으로 느린 템포와 멍때림의 유익을 예찬했다. 리트릿센터 마당에는 대나무 순이 우후죽순(雨後竹筍) 하늘 향해 솟구쳐 올라갔고, 저녁에는 하늘에서 비가 내려왔다. 철창 밖을 동경하는 갇힌 자처럼 창문에 들어붙어 대나무 숲이 젖어가는 「비멍」의 시간을 누렸다. 혼란스러운 세상의 엔진을 잠시 꺼두는 시간, 그것이 영혼의 엔진이 돌아가는 시간이다. 하이데거는 「존재하는 것」들 때문에 「존재함」을 잊고 산다고 지적했다. 누구나 이익을 발견했을 때는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불멍, 비멍의 시간에는 초첨을 풀어버린다. 그렇기에 영혼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스마트폰에서는 잊을만하면 칼과 오물이 튀어나온다. 잠시 전원을 꺼둘 수 있는 용기가 없다면 자기 영혼을 위해 시간을 내주는 용기도 낼 수 없을 것이다. 리트릿센터 침실 머리맡에는 밤새 졸졸졸 온천물 흘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차분하고 일정했다. 우리가 열어둔 나가시온천 때문일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 주인공 와타나베가 친구의 죽음으로 인해 삶과 죽음을 고민할 때 들려오던 시냇물 소리처럼… 내가 들었던 물소리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휘둘리며 살지 않고, 흘러가며 살아도 될 것 같아서 안심이 되었다. 아침에는 어김없이 새들이 창가에서 지저귀었지만, 못 들은 척 하루쯤은 늦잠을 자는 게으름도 특별한 위로였다. 뒹굴거리면서 그 진실한 자연의 소리로 귀를 씻어내야 한다. 비 갠 하늘을 바라보며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고 하나님의 세계는 아름답다는 것을 또 한 번 선언해야 했다.
마음에 여유가 없는 민수기 16장의 사람들, 줏대 없이 휘둘리고, 책임감 없이 남 탓만 하는 세상에 다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죽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죽음의 생각이 전염되는 세상에 살면서 누가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탓할 것인가. 인간들은 끝까지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고, 회개하지도 않았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회개에 있어서 불능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운명은 모세의 마음가짐에 달려있었다. 모세와 아론은 미움받았던 피해자이다. 속이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했으니 자기를 괴롭힌 사람들이 역병으로 죽어 나갈 때 필 짱 끼고 바라보고 싶지 않았을까? 하나님께 더 죽여달라고 하고 싶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모세가 모세인 이유가 있다. 상처받은 모세가 아론에게 급하게 속죄를 지시하자, 상처받은 아론은 마치 007작전처럼 급하게 향로를 들고 뛰어가 상처를 준 그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사를 드렸다.
그래서 백성들은 구원을 받았다. 그 재앙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대신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속죄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백성을 용서하시는 장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반영할 인간의 사랑과 자비가 없이는, 대신 책임지는 중보의 희생이 없이는, 속죄는 일어나지 않았다. 사도신경에서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고백할 때 그 심판을 비껴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남은 사도신경에서 이어지는 속죄의 은혜에 대한 고백이다.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 사이에 서서 중보할 수 있었던 속죄가 인간을 인간답게, 사회를 사람 살아갈 만한 곳으로 만들었다. 모세와 아론도 마음고생을 했고 아팠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속죄로 달려간 것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한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