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35:9~21
35:0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35:10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35:11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그릇 살인한 자로 그리로 피하게 하라
35:12 이는 너희가 보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35:13 너희가 줄 성읍 중에 여섯으로 도피성이 되게 하되
35:14 세 성읍은 요단 이편에서 주고 세 성읍은 가나안 땅에서 주어 도피성이 되게 하라
35:15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우거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무릇 그릇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
35:16 만일 철 연장으로 사람을 쳐죽이면 이는 고살한 자니 그 고살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요
35:17 만일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손에 들고 사람을 쳐죽이면 이는 고살한 자니 그 고살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요
35:18 만일 사람을 죽일 만한 나무 연장을 손에 들고 사람을 쳐죽이면 이는 고살한 자니 그 고살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니라
35:19 피를 보수하는 자가 그 고살자를 친히 죽일 것이니 그를 만나거든 죽일 것이요
35:20 만일 미워하는 까닭에 밀쳐 죽이거나 기회를 엿보아 무엇을 던져죽이거나
35:21 원한으로 인하여 손으로 쳐죽이면 그 친 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니 이는 고살하였음이라 피를 보수하는 자가 그 고살자를 만나거든 죽일 것이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회에 여섯 개의 도피성을 마련하게 하셨다.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가 율법에 따른 보복살인을 피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죽여도 된다는 법은 실제로 존재했고, 실수로 사람을 죽인 가해자를 보호하려고 하신 하나님의 자비였다. 그러나 고의적 살인에는 해당되지 않았고, 실수에만 적용되었다. 도피성은 정의와 자비의 균형을 통해 공동체 내 억울함을 최소화하려는 하나님의 섬세한 배려였다.
오늘날 교회와 사회가 도피성의 정신을 되살린다는 것은, 누군가의 실수에 대해 몰아세우지 않고 회개와 사과, 보상과 자기 변호의 기회를 주는 관용의 태도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피해자는 피해로 인해 억울하고, 가해자는 과도한 처벌로 인해 억울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인 관점을 가지며, 그것을 완전히 통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도피성은 바로 이 교차된 억울함 속에서 정의와 자비의 균형을 모색하려는 공간이었다.
그러므로 피해자의 억울함이 여전히 남아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의 용서를 무책임하게 인용하거나 스스로 면제나 회복을 선언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용서는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신적 면죄부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공동체 안에서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성찰하게 한다.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을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 말할 수 없다. 도피성의 취지는 책임을 피하려는 자에게 도망칠 길을 허락한 것이 아니라, 제도적 폭력을 제한하신 것이다.
도피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예표로 해석하는 견해는 자비와 기회라는 측면에서는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둘을 동일한 구조로 등치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예수님을 피난처로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이 구약의 도피성과 같은 구조나 조건을 갖는 것은 아니다. 유비적 해석은 가능하지만 본질적 등치는 곤란하다. 예수님의 구원은 실수에 대한 관용이 아니라, 원죄로 타락한 인간 존재 전체를 새롭게 하시는 전인격적 구원의 사건이다. 도피성은 복음의 직접적 상징이기보다 율법의 틀 안에서 공동체의 형평성을 위해 마련된 특례이고, 복잡한 인간 감정 사이에서 억울함을 조정하려는 제도였다.
오늘 본문을 통해 두 가지를 생각한다. 첫째, 도피성은 예수님의 구원과 등식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공동체가 서로 다른 입장과 억울함 속에서도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완전히 죽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지혜롭게 모색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도피성은 사람을 죽여도 도망갈 수 있게 해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공동체의 엇갈린 이해와 감정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와 평화를 실현하려는 제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