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9:38~52
89:38 그러나 주께서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노하사 물리쳐 버리셨으며
89:39 주의 종의 언약을 미워하사 그 관을 땅에 던져 욕되게 하셨으며
89:40 저의 모든 울타리를 파괴하시며 그 보장을 훼파하셨으므로
89:41 길로 지나는 자들에게 다 탈취를 당하며 그 이웃에게 욕을 당하나이다
89:42 주께서 저의 대적의 오른손을 높이시고 저희 모든 원수로 기쁘게 하셨으며
89:43 저의 칼날을 둔하게 하사 저로 전장에 서지 못하게 하셨으며
89:44 저의 영광을 그치게 하시고 그 위를 땅에 엎으셨으며
89:45 그 소년의 날을 단촉케 하시고 저를 수치로 덮으셨나이다(셀라)
89:46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 주의 노가 언제까지 불붙듯 하시겠나이까
89:47 나의 때가 얼마나 단촉한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89:48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그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셀라)
89:49 주여 주의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맹세하신 이전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
89:50 주는 주의 종들의 받은 훼방을 기억하소서 유력한 모든 민족의 훼방이 내 품에 있사오니
89:51 여호와여 이 훼방은 주의 원수가 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의 행동을 훼방한 것이로소이다
89:52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공동체가 그 언약을 의심해야 할 정도의 절망과 혼란에 빠져 있다. 모든 근간이 무너져 내리고 세상 가운데 수치를 당하고 있다. 약속과 현실 사이의 괴리 때문에 괴로워한다. 하나님의 언약은 분명하지만, 인간이 현실 속에서 느끼는 감정은 그 언약의 무게를 지탱해 내지 못한다. 현실적 고통이 길어지면 인간은 약속보다 상황에 더 많은 영향을 받게 되고, 결국 약속을 붙들지 못한 채 상황에 흔들리며 중심을 잃어버린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비현실적이라 믿기 어렵다고 하지만, 사실 인간은 현실조차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약속과 현실 사이의 충돌이 커질수록, 사람은 감정적으로 흔들리게 된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내적 충돌을 인지부조화라고 부른다. 신앙을 둘러싼 긴장이 깊어지면 사람들은 보통 두 가지 방식으로 반응한다. 하나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의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며 자기를 붕괴시키는 것이다.
신념의 해체이든 자아의 포기이든, 그 뿌리는 약속에 있지 않고 모두 감정의 상처에 있다. 감정이 다치기 시작하면 인간은 한없이 흔들리고 무너진다. 마치 약속이 폐기된 것처럼 느껴지고, 하나님이 자신을 버린 것 같이 여기다가, 마침내는 하나님은 없다라는 결론에까지 이른다. 감정에게 속은 것이다. 약속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막다른 골목에 몰린 감정이 약속을 믿지 못하고 속은 것이다.
상황을 바꿀 힘이 없으니, 이 위기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버티는 길을 찾는 것뿐이다. 약속이라는 원칙은 감정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래서 약속보다 감정을 먼저 다루는 접근은 실제적 일 수 있다. 감정이 나를 속였으니 나도 감정을 속여보는 것이다. 인간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기도 하고, 작은 칭찬에 들뜨며 자존감을 회복하기도 한다. 때로는 감정을 달래고 속이는 방식으로라도 안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것으로 약속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다면…
시인은 절망적인 현실 한가운데서 마음의 토로를 멈추지 않았고, 결국 찬송으로 시를 마무리한다.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 89:52」 이라는 마지막 절에서 느껴지는 호흡은 벅차보인다. 찬송이 막혀있기 때문에 끙끙거리며 찬송의 자리로 가고 있는 것 같다. 감정을 이기지 못하는 현실, 그 현실이라는 옷을 잠시 벗을 수 있는 힘은 종교와 예술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던 것이다. 찬송은 기어이 노폐물을 씻어내고 감정을 새롭게 해줄 것이다. 그는 감정의 무너짐 속에서도 계속해서 기도시를 쓰고 있다. 시가 완성되었을 즈음에, 그는 다시 버틸 힘을 얻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