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6:1~10
6:1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6:2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6: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 하면
6:4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6: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6:6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6:7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6: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1세기 에베소는 문화와 상업의 중심지였지만, 한편 인간을 물건처럼 사고팔던 노예시장이 있던 곳이기도 했다. 인구의 절반이 노예였다고 전해진다. 바울은 그런 도시에서 복음 안에서 노예나 상전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급진적인 선언과 함께 교회를 시작했다. 에베소의 경제와 종교는 계층적으로 분명한, 차별화된 고급 브랜드였다. 그러나 교회는 노예와 상전, 유대인과 헬라인이 함께 예배하는 어색하고 불편한 공동체로 시작했다.
바울은 노예제를 정면으로 비판하지 않고 혁명을 선동하지 않는다. 인권에 대한 의식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상전과 종이 서로 형제라 부르고, 함께 떡을 떼고, 서로 섬기는 공동체,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공동체를 먼저 세운다. 교회 안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우열이라는 허상을 허물 수 있어야 그 다음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노예를 피해자의식에 가두지 않고 먼저 노예들에게 상전을 공경하라고 가르쳤다.
오늘 본문은 틀림없이 모든 위치에 있는 공동체 구성원에게 주는 말씀이다. 하지만 적어도 본문 안에는 상전에게 종을 섬기라는 명령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상전은 섬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다른 곳에서는 그것도 가르쳤다. 다만 바울이 사랑의 시작점을 더 낮은 곳에 설정한 것뿐이다. 상전이 노예에게 베푸는 친절보다, 노예가 상전을 섬기는 마음 안에는 더 뚜렷한 진정성이 담기기 때문이 아닐까? 수천 년 후, 노예제 폐지를 위해 싸운 이들의 용기는 바울과 바울이 남긴 서신에서 그 의지할 근거를 찾았을 것이다.
세상의 차별은 여전히 교회 문턱에 걸려있다. 학벌, 경제력, 직업, 성별, 연령, 국적, 신체적 조건은 사람들은 나눈다. 그런 것에 대한 정치적이고 제도적인 노력은 적극적인 차별을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까지다. 법과 제도가 사람을 사랑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율법의 한계이기도 했다. 복음은 정치적 혁명보다 더 깊은 변혁을 요구한다. 제도보다 빠른 이웃에 대한 관심, 형제에 대한 배려, 서로 받아들이는 환대, 그것이 복음의 방식이다. 바울은 억울하고 속상하고 차별받는 노예들에게 그들의 상전을 사랑하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