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16:35~52
16:35 그러므로 너 음부야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어다
16:36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네 누추한 것을 쏟으며 네 정든 자와 행음함으로 벗은 몸을 드러내며 또 가증한 우상을 위하여 네 자녀의 피를 그 우상에게 드렸은즉
16:37 내가 저의 즐거워하는 정든 자와 사랑하던 모든 자와 미워하던 모든 자를 모으되 사방에서 모아 너를 대적하게 할 것이요 또 네 벗은 몸을 그 앞에 드러내어 그들로 그것을 다 보게 할 것이며
16:38 내가 또 간음하고 사람의 피를 흘리는 여인을 국문함 같이 너를 국문하여 진노의 피와 투기의 피를 네게 돌리고
16:39 내가 또 너를 그들의 손에 붙이리니 그들이 네 누를 헐며 네 높은 대를 훼파하며 네 의복을 벗기고 네 장식품을 빼앗고 네 몸을 벌거벗겨 버려두며
16:40 무리를 데리고 와서 너를 돌로 치며 칼로 찌르며
16:41 불로 너의 집들을 사르고 여러 여인의 목전에서 너를 벌할지라 내가 너로 곧 음행을 그치게 하리니 네가 다시는 값을 주지 아니하리라
16:42 그리한즉 내가 네게 대한 내 분노가 그치며 내 투기가 네게서 떠나고 마음이 평안하여 다시는 노하지 아니하리라
16:43 네가 어렸을 때를 기억지 아니하고 이 모든 일로 나를 격노케 하였은즉 내가 네 행위대로 네 머리에 보응하리니 네가 이 음란과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다시는 행하지 아니하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16:44 무릇 속담하는 자가 네게 대하여 속담하기를 어미가 어떠하면 딸도 그렇다 하리라
16:45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어미의 딸이요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형의 동생이로다 네 어미는 헷 사람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며
16:46 네 형은 그 딸들과 함께 네 좌편에 거하는 사마리아요 네 아우는 그 딸들과 함께 네 우편에 거하는 소돔이라
16:47 네가 그들의 행위대로만 행치 아니하며 그 가증한대로만 행치 아니하고 그것을 적게 여겨서 네 모든 행위가 그보다 더욱 부패하였도다
16:48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 아우 소돔 곧 그와 그 딸들은 너와 네 딸들의 행위 같이 행치 아니하였느니라
16:49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 딸들에게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16:50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16:51 사마리아는 네 죄의 절반도 범치 아니하였느니라 네가 그들보다 가증한 일을 심히 행한고로 너의 가증한 행위로 네 형과 아우를 의롭게 하였느니라
16:52 네가 네 형과 아우를 논단하였은즉 너도 네 수치를 담당할찌니라 네가 그들보다 더욱 가증한 죄를 범하므로 그들이 너보다 의롭게 되었나니 네가 네 형과 아우를 의롭게 하였은즉 너는 놀라며 네 수치를 담당할지니라고 너를 따르는 자가 없음이며 또 네가 값을 받지 아니하고 도리어 줌이라 그런즉 다른 여인과 같지 아니하니라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정점에 있었지만, 그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나님이 변덕스러워서가 아니라 예루살렘이 자초한 일이다. 은혜는 하나님에게 받고, 온갖 정성은 우상에게 쏟아부었다. 우상은 어떤 종교적 오브제가 아니다. 지금 마음과 정성을 쏟고 있는 바로 그것이 우상이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타락의 상징이던 소돔과 사마리아보다 더 악하게 타락한 상태라고 평가하셨다.
그리스도인이 세상보다 더 악해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와 은혜가 삶 속에서 내면화되지 않고, 오히려 종교적 특권의식만 강조되면서 신앙이 자기 부조리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이는 자기반성을 차단하고, 가상의 적을 만들고, 그 적을 비난함으로써 ‘나는 잘 믿는다’는 자기기만의 구조를 낳는다. 믿음은 내면의 가치로 증명되는 것이지, 누군가를 혐오하는 방식으로 증명할 수 없다.
그 결과 소통은 단절되고, 호환되지 않으며, 고립이 심화된다. 하나님의 절대성,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유일성과 종교적 독단이나 폐쇄성은 서로 다른 것이다. 비판받을 행동 때문에 비난받는 것을 의를 위해 고난받는다는 자기연민으로 대체하는 것은 간증이 아니다. 외형적 경건과 제의가 더 크고 화려해지는 것이 내면의 부패를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양심과 이성은 점점 마비되고, 어느새 세상보다 파렴치한 비윤리적 집단으로 전락하는 역설이 발생한다.
그 무책임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 하나님은 타락한 예루살렘을 향해 심판을 선포하신다. 인간의 시각에서 그것은 멸망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갱신을 위한 하나님의 최후 수단이다. 고통받는 인간은 ‘왜’라고 호소하겠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는 듣지 않다가, 몸이 힘들어지고 나면 ‘왜’라고 악다구니를 한다. 그러나 멈춤은 파괴가 아니라 방향 재설정을 위한 과정이다. 지속적인 질주는 관성으로 가능하지만, 멈출 때는 큰 에너지가 필요하고, 멈춘 후 다시 가속하려면 더 큰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남은 힘이 있다면 무의미한 관성의 질주를 멈추는 데 사용해야 한다. 계속 달릴수록 무감각해질 뿐이기에, 열심보다 멈춤 속에서 길이 보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