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16:53~63
16:53 내가 그들의 사로잡힘 곧 소돔과 그 딸들의 사로잡힘과 사마리아와 그 딸들의 사로잡힘과 그들 중에 너의 사로잡힌 자의 사로잡힘을 돌이켜서
16:54 너로 네 수욕을 담당하고 너의 행한 모든 일을 인하여 부끄럽게 하리니 이는 네가 그들에게 위로가 됨이라
16:55 네 아우 소돔과 그 딸들이 옛 지위를 회복할 것이요 사마리아와 그 딸들도 그 옛 지위를 회복할 것이며 너와 네 딸들도 너희 옛 지위를 회복할 것이니라
16:56 네가 교만하던 때에 네 아우 소돔을 네 입으로 말하지도 아니하였나니
16:57 곧 네 악이 드러나기 전에며 아람 딸들이 너를 능욕하기 전에며 너의 사방에 둘러 있는 블레셋 딸들이 너를 멸시하기 전에니라
16:58 네 음란과 네 가증한 일을 네가 담당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16:59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맹세를 멸시하여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네 행한대로 네게 행하리라
16:60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16:61 네가 네 형과 아우를 접대할 때에 네 행위를 기억하고 부끄러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네게 딸로 주려니와 네 언약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16:62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서 너로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니
16:63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16장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언약의 아내로 택하셨으나 그 아내가 음행과 배반을 저질렀음을 고발했다. 이에 하나님은 심판하시겠지만. 하나님은 심판받은 후의 회복까지도 약속하셨다. 다만 회복이 즉시로 오지는 않는다. 먼저 예루살렘은 자신의 수치를 기억하고, 그 부끄러움에 직면해야 한다. 부끄러움을 인정하고, 책임을 받아들이는 자리에서 은혜가 진실하게 경험될 것이기 때문이다. 수치를 알아야 그것을 가려주시는 고마음을 알 것이고, 절망을 알아야 구원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부끄러운 것을 숨기고 싶어 한다. 그래서 우리는 회피한다. 말을 바꾸고, 상황 탓과 남 탓을 한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를 속인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부끄러움의 뿌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 뿐이다.
믿음은 부끄러움을 직면하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항상 고통이 따른다. 자신을 인정하는 것은 아픈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순간,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에만 의지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하나님에게 고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의 치부를 하나님이 감추어주시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수치를 숨기면서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영혼이 솔직하지 않은 사람은 회개할 수 없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히브리서 12:2” 예수님도 부끄러움을 당하셨다. 십자가는 모욕적이고 수치스러운 형벌이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신 것이 아니고 내가 인정하고 고백하는 나의 수치를 대신 지신 것이다. 그 일을 위해서 그리스도는 부끄러움을 피하지 않으셨다. 그것을 고백할 수 없다면 십자가는 아직 나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조차 자신의 수치를 고백할 용기가 없다. 회개 기도라고 말하지만, 대개는 ‘거룩한 언어’로 포장되어 있다. 입으로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지만, 오히려 경건한 사람이라는 박수를 받는다. 안전해 보이지만, 진실하지 않다. 그것은 부끄러움을 직면하는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 감추는 것이다. 그래서 수치를 드러내고 기도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고, 회개의 기도는 드물다. 필요한 것은 자기 연민이 아니고 회개다. 회개는 사람들 앞에서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고요한 시간에 깊은 내면으로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