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16:1~10
16:1 요셉 자손이 제비 뽑은 것은 여리고 곁 요단 곧 여리고 물 동편 광야에서부터 나아가 여리고로 말미암아 올라가서 산지를 지나 벧엘에 이르고
16:2 벧엘에서부터 루스로 나아가 아렉 사람의 경계로 지나 아다롯에 이르고
16:3 서편으로 내려가서 야블렛 사람의 경계에 이르러 아래 벧 호론 곧 게셀에 미치고 그 끝은 바다라
16:4 요셉의 자손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그 기업을 얻었더라
16:5 에브라임 자손의 그 가족대로 얻은 것의 경계는 이러하니라 그 기업의 경계는 동으로 아다롯 앗달에서 윗 벧 호론에 이르고
16:6 또 서편으로 나아가 북편 믹므다에 이르고 동편으로 돌아 다아낫 실로에 이르러 야노아 동편을 지나고
16:7 야노아에서부터 아다롯과 나아라도 내려가서 여리고에 미치며 요단으로 나아가고
16:8 또 답부아에서부터 서편으로 지나서 가나 시내에 미치나니 그 끝은 바다라 에브라임 자손의 지파가 그 가족대로 얻은 기업이 이러하였고
16:9 그 외에 므낫세 자손의 기업 중에서 에브라임 자손을 위하여 구별한 모든 성읍과 촌락도 있었더라
16:10 그들이 게셀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가나안 사람이 오늘날까지 에브라임 가운데 거하며 사역하는 종이 되니라
오늘 본문에서는 요셉 자손,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기업을 분배받는다. 그러나 여기서도 하나님이 명하신 가나안 진멸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공존의 현실에 머물게 된다. 이상은 ‘거룩한 분리’였지만, 현실은 ‘불완전한 공존’이었다. 분리 명령과 현실의 공존 속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실까? 그리고 지금 우리는 무엇에 대해서 분리하고, 무엇에 대해서 공존을 적용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진멸하지 않은 것은 불순종이지만, 가나안 정복의 진멸은 가나안 종교 체제가 가진 문제로부터 언약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체제적이고 구조적 분리였다. 더 넓게 보면 출애굽은 억압에서의 해방, 가나안 정복은 우상 체제로부터의 정체성 확보, 율법은 그 정체성을 윤리적 질서로 형성하는 것이었고, 십자가는 그 모든 조각을 하나의 보편적 구원으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분리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이 모든 민족의 복으로 나아가기 위한 단계적 과정이다. 성숙한 통합은 단호한 단절을 경험한 후에나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는 배타성과 보편성이 동시에 존재한다. 예수님도 죄인, 사마리아인, 이방인과 공존하셨지만, 유대인의 형식적 종교와 위선에 대해서는 단호하셨다. 바울도 모든 사람과 공존했지만 복음은 타협하지 않았다.
공존하겠다는 것은 진리와 비진리를 묻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다. 인종, 문화, 언어, 지위가 다르고 비록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라도 평화롭게 공존해야 하고 사랑과 환대를 실천해야 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가진 신념과 체계 자체를 모두 참인 진리로 인정한다는 것은 아니다. 복음의 고유성, 예수의 유일성은 섞을 수 없고, 섞이지도 않는다. 다만 사랑의 윤리로 공존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었으나” 동시에 “다른 복음은 없다”고 했다.
세상 속에 예수 믿는 목소리는 희미해져가는데 종교단체의 고집스러운 목소리는 갈수록 커진다. 거룩과 세속이 분리된 것이 아니고, 교회와 세상을 이중적으로 살아가는 타협의 기술만 늘었다. 다수에 의해 일반화되고 나면 양심에 걸리지도 않는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진멸하지 못한 것을 읽고, 그것을 비판해본들 나에게 무엇이 남을까? 이웃을 혐오하는 정치적 악다구니만 더 커지는 시대, 우리끼리가 좋고 지금까지가 좋은 우리는 무엇과 분리해야 할 것인지, 그리고 무엇과 공존해야 하는 것인지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