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21:1~7
21:1 때에 레위 사람의 족장들이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 족장들에게 나아와
21:2 가나안 땅 실로에서 그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모세로 명하사 우리의 거할 성읍들과 우리의 가축 먹일 그 들을 우리에게 주라 하셨었나이다 하매
21:3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을 따라 자기의 기업에서 이 아래 성읍들과 그 들을 레위 사람에게 주니라
21:4 그핫 가족을 위하여 제비를 뽑았는데 레위 사람 중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와 베냐민 지파 중에서 제비대로 십 삼 성읍을 얻었고
21:5 그 남은 그핫 자손들은 에브라임 지파의 가족과 단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 중에서 제비대로 열 성읍을 얻었으며
21:6 게르손 자손들은 잇사갈 지파의 가족들과 아셀 지파와 납달리 지파와 바산에 있는 므낫세 반 지파 중에서 제비대로 십 삼 성읍을 얻었더라
21:7 므라리 자손들은 그 가족대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스불론 지파 중에서 십 이 성읍을 얻었더라수자의 손에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그는 회중 앞에 설 때까지 거기 있을 것이니라
이스라엘 공동체는 땅의 분배로 재산을 소유하게 될 것이고, 소유는 곧 비교와 계산, 욕망과 갈등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이미 지파 간의 불만과 요구가 상충하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레위 지파는 소유를 받지 못했다. 레위인이라 하여도 상대적 박탈감이 있었을 것이다. 레위 지파는 땅을 소유하지는 못했지만 거주지를 요구했다. 그들이 땅을 소유하지 않는 것도 약속이었고, 토지를 경작하는 생산노동을 하지 않아도 거주와 생활이 보장되는 것도 약속이었다.
레위인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지 않으신 것은 소유의 구조 안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탐욕과 종교 권력의 세속화를 미리 제한하려는 하나님의 선제적인 의도였을 것이다. 레위인이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산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이고 그것으로 재산을 축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다만 그들은 예배와 율법과 공동체 질서를 관리하는 노동을 했다. 그러한 레위인의 존재는 정착 농경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사회가 경제 논리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환기하는 역할이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 ‘리바이스(Levi’s)’라는 이름은 레위의 이름이다. 소유와 소비를 상징하는 브랜드이지만, 성경 속 레위는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공동체의 중심을 붙들던 존재였다.
만일 레위로 대표되는 성직이 종교적 권위와 경제적 부를 동시에 가진다면, 신앙은 곧 관리의 대상이 되고, 종교는 산업이 될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는 그 시행착오를 지나왔다. -과거형으로 써도 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하나님은 레위에게 땅을 주지 않으신 것이고, 제비뽑기로 인간의 협상의 논리가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신 것이다. 레위인을 모든 지파 안으로 뿔뿔이 흩어 거주하게 하신 것도 종교 권력이 집중되는 구조를 미리 해체하신 것이다.
역사 속에서 가톨릭 교회는 같은 문제를 다른 방법으로 풀려고 했다. 사제의 결혼을 제한한 것은 영성과 헌신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동시에 성직이 소유와 세습의 논리로 흘러가지 않도록 하려는 고민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러나 제도가 본능을 억제할 때 부작용을 피해갈 수는 없다. 억제는 왜곡을 낳고, 차단은 또다른 균열을 만든다.
개신교는 성직자의 결혼과 가정, 그리고 사회적 권리를 상당 부분 회복했다. 그로 인해 신앙은 일상의 삶과 더 가까워졌지만, 동시에 성직과 소유가 맞물리며 또 다른 형태의 위험에 노출되었다. 답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현실은 발견했다. 인간의 욕망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완전한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름받은 사람이 지금 어디에 서 있든지, 그 틈 어딘가에서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다”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말씀과 예배가 이어져 갈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