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요한복음 3:1-8
3: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3: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니고데모는 유대의 산헤드린의 공회원이면서 학자였습니다. 요한은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이라고 했고 「유대인의 관원」이었다고 소개합니다. 예수님도 10절에서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니고데모라는 인물은 유대 사회가 인정하는 능력과 이력을 갖춘 엘리트임에 분명했습니다.

 

그토록 훌륭해 보이는 것들은 오히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장애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회는 지위라는 계층을 만들고 사회적 평가에 따라 명예를 주고 부의 축적의 정도로 계급화합니다.

 

물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와 존경받을 만한 명예와 부유함은 그 자체로 부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것을 죄악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것이 크면 클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앞으로 나오기가 어렵다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이 단순하고 명확한 사실은 믿음의 반대편에 세상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니고데모는 모두가 잠든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요한은 이 사실을 단도직입적으로 「니고데모가 유대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전합니다. 니고데모는 분명히 주위의 눈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것에 대해서 비웃거나 비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해하지 못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에게 있어서도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 대한 세상의 이목과 평가는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무엇인가를 손해보지 않을까, 어떤 종교적인 것에 속지는 않을까라는 걱정과 함께 세상의 눈은 나를 무엇이라고 말할까라는 조심스러움을 가지고 나갔었습니다.

 

저는 이어령 선생이라는 한 지식인의 회심 과정을 책과 강연을 통해서 자세히 전해들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하용조 목사에게 이끌려 2007년 사이타마에서 열렸던 러브 소나타라는 전도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그 현장에서 봉사하고 있었는데 많은 군중 앞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자신이 소개될 때 그의 얼굴빛을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검은색 그 자체였습니다. 참 많은 고뇌를 했구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날이 2007년 7월 24일이었고 이어령 선생은 그 전날 23일에 동경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그 갈등과 고뇌는 얼굴에 그대로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기쁜 일이고 축하할 일이지만 본인이 가진 지위와 지식과 명성이 그 고뇌를 심화시켰을 것입니다.

 

이어령 선생은 솔직했습니다. 그날 짧은 간증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지금껏 나는 이성의 힘, 지성의 힘으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지성과 영성, 그 문지방 위에 서있습니다. 나도 궁금합니다. 내 앞에 놓인 것이 과연 「벽」인지 「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날카로운 문학비평가, 초대 문화부 장관, 유수대학의 석좌교수라는 명성은 그 자리에서 무너졌습니다. 자신의 평생의 지론과 정반대의 결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문학가에게 있어서 신앙은 마이너스로 작용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환영의 박수를 쳤지만 독자는 떨어져나갔고 조소와 비난의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저는 그분에 대해서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후의 신앙의 행적에 대해서 읽고 들어 알고 있습니다. 시대의 교회가 사용하는 추상적이고 비지성적인 언어들을 배제하고 한편 여전히 비판적이면서도 진실하게 믿음의 길을 찾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식과 믿음을 이간질시키는 시대에 지성의 힘이 영성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지식과 지성은 좀 다릅니다. 사전적 의미의 지식(knowledge)은 어떤 대상에 대하여 배우거나 실천을 통하여 알게 된 인식이나 이해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지성(intelligence)은 지각된 것을 정리하고 통일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식을 낳게 하는 정신 작용의 지적 능력입니다. 지식은 얼마든지 믿음의 반대편에 서 있을 수 있지만 지성은 결국 하나님을 만날 것입니다. 생각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그 끝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버슬리 머리(Beasley Murray)는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왔던 ‘밤”은 니고데모가 처해 있었던 영적 무지상태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함의를 가진다고 했습니다. 그럴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그렇게 들여다보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다 다양한 동기로 첫발을 내디디었습니다.

 

양심적인 지성이 하나님을 알아가면 흔들리지 않는 담대함을 가집니다. 요한복음 7장에서 니고데모는 동료들 앞에서 예수님의 말을 직접 듣지 않고 정죄할 수 없다며 예수님을 변호했었고 사형수로 죽은 예수님의 시신을 받아와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그가 제도권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제도권에 남아있던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가톨릭 전승에 의하면 니고데모는 당당한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했고 결국 유대인들에게 순교를 당했습니다. 니고데모가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니고데모 안에서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의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읽어보면 접점을 찾지 못하는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그 머뭇거림이 나빠보이지 않습니다. 머뭇거려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니고데모에게 불어온 바람은 호기심같은 산들바람이었지만 지성은 영성이 되어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드릴 수 있는 강력한 바람이 되었습니다. 니고데모에게 불었던 바람은 천천히 그러나 일관되게 불었습니다.

 

인간 속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사역는 불가해합니다. 그것을 우선 인정합시다. 임의로 분다는 말은 자발적으로 분다는 말입니다. 어느 누가 하나님의 불어오시는 바람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바람은 자유롭게 불어오고 다시 어디론가로 사라집니다. 무리하게 그것을 일반화하거나 법칙으로 정리할 수 없습니다.

 

저는 바람을 아주 좋아합니다. 바람이 좋아서 바람을 잡아서 주머니에 넣어보려해도 바람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바람을 사랑하는 방법은 바람이 불어올 때 얼굴을 한 번 디밀어 보는 것 밖에 없습니다. 바람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바람을 느끼는 것 말고는 바람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이해될 수 없었던 것처럼 지금도 세상은 여전히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임의로, 그 뜻하신대로 어디서 오는지도 알 수 없는 바람을 맞고 보면 생각과 마음과 정신이 환기됩니다. 마음을 물로 씻어내고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으면 하나님 나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거듭남은 영어로 Born Again이라고 하고 한자어로 중생(重生)이라고 합니다. 다시 태어나는 것이고 거듭 태어나는 것입니다. 부분적인 변화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면 반드시 이 강을 건너야 합니다. 이것은 육체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영으로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아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신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면 다른 영에게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안 믿으면 자연상태로 남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 세상에 붙잡혀 있는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신 것이지 많은 선택지 중에 하나를 더하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에게 고함 중에 좋아하는 글귀 소개하겠습니다.

고향을 그리워 말라
어디서 왔는가 묻지 말며
어디로 간들 두려워 말라
항해가 곧 우리의 고향이니
끝없이 가는 이 여행길을 삶을 사랑하라
바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되
바람은 자유롭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