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8~20
2: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2: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2: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2: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2: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2: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2: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2: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2:18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2: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2:20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12월 21일 ETC 예배 설교 「말구유의 평화」 중에서-
마굿간에 있는 말구유는 말이 먹이를 먹는 밥통이다. 말의 생존을 위해서 매일 사용되는 도구이다. 먹고 살아야 하는 밥통, 그 밥통 안에는 온갖 더러운 것이 함께 있다. 배설물이 튀어들고, 말이 핥던 침과 남은 여물과 사료 지꺼기가 한 데 섞여 부패를 일으키는 세균 덩어리가 구유라는 밥통이다. 위생적으로 치면 마굿간이라는 똥통이나 말구유라는 밥통이나 다를 것이 없다. 신생아 예수는 거기에 누웠다.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은 그 열악한 환경에 곤란해 하거나 놀라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 사실을 모르고 그곳에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곳에 오시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 오시는 크리스마스에 사람들이 좋은 호텔을 내어주지 않았고, 안전한 병원으로 맞이하지 않은 것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날 베들레헴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절했지만 그것은 인정머리없는 인간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신학적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뿐이니까.
인간도 욕심을 부리면서 먹고 마시고, 냄새나고 지저분한 것을 배설하며 살아간다. 인간의 구유 안에도 욕심과 수치가 세균처럼 바글거린다. 그래서 구유란 목가적이지도 않고, 예수님이 출산할 때 환경의 열악함이나 가난과 결핍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속일 수 없고 미화할 수 없는 생존의 실제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아기 예수님이 누웠던 구유는 그날 저녁 말이 여물을 먹었던 구유였을지도 모른다. 아직 축축한 구유는 인간과 세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자리였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실 때, 처음 누운 곳은 먹고 살아야 하는 밥통이었고 하나님은 그 위에 성육신을 세우셨다. 먹이를 담는 구유, 나의 밥그릇… 생존을 위해서는 냉정할 수 밖에 없고, 욕심을 위해서는 노골적일 수 밖에 없는 그곳에 누우셨다. 아기 예수가 구유에 누이신 것의 의미는 하나님의 성육신이 인간의 조건을 전면적으로, 그리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신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고, 결국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내어주셨다. 구유를 채우는 여물은 말에게 먹히기 위한 것이고, 구유에 누이신 생명의 떡은 인간에게 먹히기 위한 것이었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시는 사건이었다. 크리스마스의 비극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더 많은 구유의 먹이만 바라고 있는 인간의 현실이다. 크리스마스는 나의 개걸스럽고 욕심많은 밥그릇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채워주신 거룩한 성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