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3:13~24
3: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3: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3:20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
3: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3: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3:24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한일서의 ‘사랑하라’는 명령은 문맥 없이 등장한 윤리적 요구가 아니다. 요한은 처음부터 의도된 흐름을 따라서 글을 전개해 오다가, 이제 마침내 자신이 말하고자 했던 결론, 곧 사랑에 도달했다. 그 순서는 분명하다. 신앙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보고 듣고 만진 생명의 말씀과의 만남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만남은 개인의 내면적 체험에 머무르지 않고, 처음부터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삶의 방식이었다.
이 관계를 지키기 위해 요한은 빛 가운데 행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것을 숨기지 않고 인정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머무를 수 있다. 문제는 죄 그 자체가 아니라, 죄를 부인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협하는 위선이다. 요한은 도덕적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진실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이 관계가 삶 속에서 어떻게 검증되는지를 더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지식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며, 반드시 삶의 방향과 태도로 나타나야만 한다. 그것을 확인하는 첫 과제가 바로 형제이다. 하나님과의 사귐은 곧 성도 간의 사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요한이 말하는 ‘새 계명’은 형제 사랑이다. 요한이 처음부터 말해 온 생명과 빛, 그리고 교제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가장 구체적인 결과는 사랑이다.
참인지 거짓인지, 하나님께 속했는지 세상에 속했는지는 종교적 교리 논쟁으로는 확인해 낼 수 없다. 다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사람이 어디에 머무르고,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가는지를 통해서 숨길 수 없이 드러난다. 신앙에 있어서 사랑은 미덕이 아니다.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증명해 내는 결과다. 요한에게 있어서 사랑은 신앙의 목표가 아니라, 그 신앙이 참된 것인지를 가늠하는 기준이었다.
요한일서 전체에서 ‘사랑’이라는 말은 원어 기준으로 46회 반복되고, 오늘 본문에서만 7회 등장한다. 이 단어를 반복하지 않고는 말을 이어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요한은 사랑을 말하기 위해서 태초와 말씀과 생명과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서 인간의 가장 솔직한 삶의 자리까지 내려왔고, 그 모든 여정을 통과한 끝에 움직일 수 없고 의심할 수 없는 결과로서의 사랑을 발견했다. 요한일서는 바로 그 발견을 기록한 편지다. 요한 신학의 온도는 내 옆에 있는 형제의 체온과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