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9:13~22
19:13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마19:14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마19:15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시니라
마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19: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19: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마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마19: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어제 주일예배에 마가복음 10장의 부자 청년에 대해서 설교했다. 돈을 포기할 수 없었던 부자 청년은 결국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마태가 부자 청년을 다시 데리고 왔다. 나는 어제 부자 청년에 대해서 할 말을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아침에 나는 또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 가만히 읽어 보니 마태는 마가와는 조금 다른 진술 구조를 가지고 부자 청년을 재소환했다.
어제 읽은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십계명 인용 중에 「속여 취하지 말라」는 표현이 있었다. 그것은 십계명 중 하나의 계명은 아니었지만, 다른 계명을 종합한 표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쩌면 부자 청년의 재산 축적 과정이 비록 합법적이었을지라도 불의한 취득이나 착취의 문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부자 청년은 그 모든 것을 지켰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에게 합리적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가가 「속여 취하지 말라」고 한 곳에 마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대신 써 넣었다. 유대 전통 안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율법 전체를 망라하는 말씀이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22장에서 이것이 율법의 핵심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것은 십계명이 아니다. 레위기 19:18에 나오는 율법이다. 그렇다면 마태는 십계명 목록을 나열하는 맥락에서 왜 레위기를 끼워 넣었을까.
십계명은 안식일과 부모 공경 외에는 기본적으로 다 금지 조항이다. 그러나 레위기 율법은 금지 윤리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사랑의 차원이다. 부자 청년은 자기 입으로 금지 조항을 지켰다고 말했지만,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타인의 삶을 자신의 삶의 무게로 받아들여야만 가능한 삶의 방식이다. 그것을 지킨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작 자신은 지키지 못했다고 말했을 것이다. 겸손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사랑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서 부자 청년은 금지 조항 준수를 넘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대해서도 주저함 없이 「나는 이미 다 했다. 무엇이 더 필요한가」라고 말했다. 이것이 부자 청년의 자기 평가를 신뢰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19:20」. 갑자기 이 인간이 무서워졌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라고 하셨고, 그는 거기서 멈춘다.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했지만, 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돈 문제가 걸리니 자기 모순이 그대로 드러났다. 예수님이 가난한 자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유 재산의 부정이 아니라, 사랑을 추상에서 구체로 옮기라는 요구였다. 제자도를 강조하고 있는 마태는 부자 청년이 집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집으로 돌려보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