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6:30-40
6:30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6: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6: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6: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6: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6:36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이 말을 하는 의도는 오병이어는 잘 먹었지만, 그것은 겨우 한 끼를 먹은 것이니 그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겁니다. 자기 조상들은 광야 생활 40년 동안 매일 공짜로 만나를 먹었다는 것이지요.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두 달 보름을 걸어 신광야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식량은 떨어졌고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침마다 작고 둥근 서리 같은 것이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꿀 섞은 과자처럼 맛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을「만나」라고 불렀습니다. 새벽에 내리고 해가 뜨면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다는 기억은 맞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기억하지 않았던 그 조상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 광야에서 죽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과연 조상들의 광야 40년이 그들에게 자랑스러운 시간이었을까요? 수치를 모르는 발언입니다. 능력도 없고 믿음도 없어서 오합지졸처럼 떠돌던 방랑 시절이 아닙니까? 사정과 편의에 따라 역사를 수정하고 수치에 분칠을 해보지만, 그것이 자부심이 될 수는 없습니다. 만나를 요구하려거든 일단 먼저 광야로 나가야 할 일입니다.
사람들은 광야 40년 동안 자기 조상들에게 만나를 먹게 했던 모세와 같은 능력을 자신들에게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더 달라는 것, 이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목격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다는 사람들이 다시 찾아와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주신 은혜에 감사함이 없고 그 은혜의 이유를 묵상함도 없이 더 주지 않는 것을 원망하고 더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만나는 희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만나가 내림같이 지천에 있으나 희귀한 것은 그것을 받아먹은 인간의 기억입니다. 먹고 나서 손을 털고 나면 은혜의 의식도 함께 사라져 버립니다. 은혜는 땅에서 밟히고 공중으로 증발하여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더 주시지 않음으로 원망을 들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언제 모세가 너희 조상들에게 만나를 주었느냐. 만나는 내 아버지가 주신 것이고 아버지는 생명을 주시는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과 그 모양이 같습니다. 그런데 부도덕한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들리던 말이 근엄하고 경건하다는 종교인에게는 들리지 않는가 봅니다.
그들의 귀에는 하나님이라는 말도 들리지 않고 아버지도 들리지 않고 하늘도 들리지 않고 생명도 들리지 않습니다. 오직「떡」이라는 말만 들릴 뿐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생명의 떡을 말하는데 그들은 무슨 떡이든지 일단 내놓으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6:34」
요한의 편집에는 유머가 많습니다. 요한은 우리에게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게 합니다. 천국을 이야기했더니 천국이든 해장국이든 뭐든 일단 국물을 내놓으라는 격입니다. 마치 약에 중독된 자들처럼 손을 떨어가며 달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저도 밥이 좋고 돈이 좋습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참 많습니다. 교회가 건물구입을 진행 증이지만 은행에서 융자받는 일이 쉽지 않아서 이 은행 저 은행을 전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밥 달라고 조르는 유대인들을 비난하고 있는 목사도 건물 구입에 돈 걱정이 끊이지 않아서 아침에 하나님께 돈 달라고 기도하고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저께 큐티에서 주신 말씀이 생각납니다.「내니 두려워 말라」이 일을 시작하신 것도 하나님이고 진행하고 계신 것도 하나님입니다. 일을 지어 성취하시는 여호와이십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압니다. 제가 계획하거나 추진한 것이 아닌 것을 제가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배 위에 타고 있을 뿐입니다. 날이 저물고 배가 흔들려서 두려워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오셔서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매일에 주시는 말씀을 믿으면 현실이 됩니다.
밥도 좋고 돈도 좋습니다. 밥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돈을 버리라는 것도 아닙니다. 밥은 예수님이 항상 먼저 챙겨주셨습니다. 밥을 부정한 적도 없고 악하다고 한 적도 없습니다. 저녁에 식당에 나가보면 혼자 밥 먹는 아저씨들이 많습니다.
단단한 턱으로 밥을 씹고 뜨거운 국물을 들이키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것이 하루의 수고에 주시는 하나님이 위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배고픈 인간의 밥 먹는 모습은 마치 예술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밥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메세지는 명료합니다. 다만 밥에 머물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요한복음의 일곱 번의 에고 에이미 중의 그 첫 번째가 나옵니다. 메타포 시리즈로는 일곱 개이지만 에고 에이미는 그 메타포에만 있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을 근거가 에고 에이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첫 메타포는 「생명의 떡」입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고 선언하신 후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이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문맥에 따른다면 떡이라고 하셨으니 「나를 먹는 자는 주리지 않을 것」이라고 해야 할 텐데 「내게 와서 나를 믿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는 것입니다.
믿음은 사람이 밥을 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밥을 먹는 것은 일상적이면서 반복적이고 필수적인 것입니다. 매일 세 번씩 식사 시간이 돌아오지만, 그것이 지겹지 않은 것은 시간이 지나면 또 배고프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식사를 하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하면 더 즐겁습니다. 천천히 꼭꼭 씹어먹으면 더 맛있습니다.
한 달에 한번 첫 주에 정기적으로 반복적으로 드리는 성찬식에 꼭 참여하십시오. 청년 때 며칠간 금식기도를 하고 아침에 죽 먹기 전에 예배에 먼저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 예배에 성찬식이 있었습니다. 며칠간 바싹 말라 있던 육체에 예수님의 피와 살을 마시고 먹었습니다. 손톱만 한 잔에 든 포도 주스가 모세혈관을 타고 몸 구석구석으로 들어가는 짜릿함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성찬식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수혈받습니다.
매일의 말씀 묵상과 나눔의 시간을 가지는 것, 그것이 예수를 먹는 일, 영혼의 주리지 않는 일입니다. 하늘에서 내린 만나는 매일의 양식입니다. 가르는 법 없이 반드시 아침에 만나가 내리고 안식일만 그 전날에 내립니다. 안식일을 제외한 모든 날은 그날의 만나를 먹어야 합니다.
욕심을 부려서 쌓아놓아도 다음날 먹으려고 보면 상해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매일 매일의 아침의 말씀을 받아먹으십시오. 예수님의 생명 떡을 먹는 것은 영원히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아니하는 영생으로까지 이어지게 복입니다. 좀 늦었지만, 아침 식사도 맛있게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