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요한복음7:1-13
7:1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7: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7: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7: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7: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7: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7: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7: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7:9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7:10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7:11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7:12 예수께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혹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 하나
7:13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

 

유대인의 3대 절기는 유월절과 오순절과 초막절입니다. 유월절의 유래는 출애굽 할 때 거역하는 바로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애굽에 내린 열 재앙 중에 마지막 재앙이 모든 집의 사람과 가축의 장자를 죽이시는 재앙이었습니다.

 

동시에 구원의 방도를 열어두셨는데 히브리인이든 이집트인이든 자기 집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은 그 재앙이 넘어가게 하시는 약속이었습니다. 양의 피를 바른 집에는 재앙이 패스오버하였습니다. 그 구원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것이 이스라엘 최대의 명절 유월절입니다.

 

그리고 출애굽 하여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유월절 이후 50일이 지난 시점이었으므로 유대인들은 이것을 오순절로 지킵니다.

 

예수님이 애굽의 집에 바른 어린 양의 피처럼 예루살렘의 유월절에 어린 양이 되어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돌아가신 후 마가의 다락방에 제자들 위에 성령이 임하시던 날이 꼭 50일이 지난 오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유월절을 지키지 않고 사순절에 십자가를 묵상하고 오순절 대신 성령강림주일로 지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절기가 오늘 본문의 초막절입니다. 유대인의 추수감사절에 해당하는데 9월 10월 가을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초막절 한 주간을 축제로 지냅니다.

 

이때 사람들은 초막을 짓고 거주하는데 아이들에게는 캠프 같은 기억이 될 것입니다. 초막을 짓는 것은 애굽을 나와 광야 생활을 하던 중에 천막에서 살았던 것을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명절 기간 동안 제사장들은 매일 물을 길어다가 성전에 드렸는데 이것은 초막절이 끝나면 곧이어 오는 우기가 오기 때문입니다. 비를 내려주셔서 소산이 풍성하기를 기원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제 주일예배에서 보았듯이 초막절을 어떻게 지낼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고 약속의 땅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비는 하나님이 이미 약속하신 것입니다. 비가 오기를 기도할 것이 아니라 약속을 이행하면 하나님은 때에 따라 비를 내려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초막절이 다가왔다는 것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에게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메시아적 기적을 드러내 보이라는 빈정 섞인 요구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형제이지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지 못했습니다.

 

동생들이 예수님더러 초막절 명절에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에 올라가라 할 때 예수님은 「내 때가 아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자신」을 구분하시고 또 「자신의 때」와 「그들의 때」를 구분하십니다.

 

「예수의 때」라는 것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고 십자가에 올라가셔서 죽으시는 때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부활의 때이고 그때는 보냄 받기 전에 계시던 하늘의  보좌로 올라가시는 때입니다.

 

사람들은 초막절의 예루살렘에 올라가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아직 십자가의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가 아니라는 중이적 의미로 대답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헬라어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 두 개가 있는데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입니다. 「크로노스」는 시계가 나타내는 시간입니다.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수평적이고 직선적인 개념의 시간을 말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시간은 「카이로스」인데 이것은 히브리적 개념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시간으로 인식하는 수직적 개념입니다. 전도서 3장을 찾아보십시오. 전도서가 말하는 때라는 것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고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일어나는 카이로스입니다.

 

크로노스가 연속된 시간의 집합이라면 카이로스는 기회나 사건이 발생하는 시점입니다. 즉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요즘 듣고 있는 철학적 노래가 하나 있는데 우리 아이들이 매일 흥얼거리는 「할아버지의 낡은 시계 (My Grandfather’s Clock, 大きな古時計) 」라는 노래입니다. 듣고 있노라면 슬퍼지는 노래입니다. 한국어 번역은 좀 어색하고 일본어 번역이 더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이 노래가 슬픈 노래라는 것 알겠느냐고 아이들에게 물었더니 아이들도 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의 시계는 크노소스처럼 흘러 이제 수명이 다해서 움직이지 않지만, 할아버지의 시계는 할아버지의 슬픔과 기쁨을 다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시계는 할아버지가 태어날 때도 있었고 젊은 날 어여쁜 신부와 결혼할 때에도 있었고 그리고 할아버지가 죽을 때에도 시계는 그것을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할아버지의 카이로스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시간 안에서 삽니다.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의 크로노스가 주어져 있지만 24시간이 지나면 하루가 끝나듯이 주어진 크로노스가 다하면 인생은 오래된 시계처럼 멈추어야 합니다. 아무도  크로노스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 안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간 안에 삶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카이로스는 인생의 모든 순간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시간을 초월하시는 아니 시간을 창조하신 영원의 하나님이 우리 삶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 카이로스의 사건입니다.

 

시간의 시작과 끝에 대해서는 아무도 답할 수 없습니다. 인간으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것이 시간의 비밀이지만 그럴지라도 시간은 어디까지나 유한한 개념입니다.

 

그러나 영원은 시간의 개념이 아닙니다. 시간의 길이조차 측정할 수 없는 인간이 어찌 영원을 알 수 있겠습니까? 카이로스는 시간의 점 안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 나타나 주시는 영원한 하나님의 현현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카이로스는 틀림없이 2000년 전 십자가라는 크로노스 안에서 실현되었습니다. 에다가와 사랑의 교회와 성도의 삶에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함께 하셔서 우리의 삶과 믿음에서 이야기가 어어져 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