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요한복음14:15-24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4: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14: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14: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요한복음 13장부터 17장까지는 이른바 다락방 강화입니다. 즉 마가의 다락방에서 하신 예수님의 고별 설교입니다. 그중에 17장은 예수님의 기도로 되어 있으니 가르침은 13장의 세족식으로부터 시작해서 16장까지라고 할 수 있는데 중간 중간에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시며 말씀을 이어가는 형식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를 말하기 위해서는 13장부터 다시 전체를 훑으면서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을 참조했을 때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까지도 제자들은 누가 더 크냐는 문제로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질책하지 않고 옷을 벗어 놓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발꿈치를 들었다고 표현한 가룟 유다의 발까지 씻기셨지요. 발 씻기시기를 마치시고 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세족과 새 계명은 원래 하나의 메시지였습니다. 새 계명이라는 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는 세족식에서 보여주신 겸손 또는 지금까지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나중에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면 제자들에게 기억나게 하실 말씀입니다. 성령이 임하는 시기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입니다.

 

장소는 여전히 지금의 이 장소 마가의 다락방입니다. 즉 제자들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한 그 사랑을 기억해 낼 것이고,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래서 13장 34절과 35절은「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 서로 사랑함에 대한 주제로 설교를 이어가시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디 가신다는 말이 들리는 것 같으니 베드로가 벌떡 일어나 나는 죽어도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베드로가 그날 새벽에 세 번 부인할 것을 예언하십니다. 가신다는 말에 과민반응하는 베드로에게 엄한 말씀으로 부인할 것에 대해서 예언하시긴 했지만, 마음이 안 편하셨는지 여기서 하시려던 새 계명의 설교 문맥을 접어 두고 어쩔 수 없이「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번에는 그 말을 듣고 있던 도마가 일어나서 예수님이 혼자서 먼저 가버리시면 우리가 나중에 어느 길로 가야 할 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봅니다. 길을 모르겠다는 도마에게 예수님은 또 어쩔 수 없이 「내가 길」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길이시니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는 말씀을 하신 것인데 이번에는 이 말을 들은 빌립이 일어나서 그러면「아버지 좀 보여주세요. 그러면 우리가 믿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또 어쩔 수 없이 빌립의 요구에 대한 대답으로 성부와 성자의 본질적 단일성, 즉「예수님을 본 자는 곧 아버지를 본 것이며,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 안에 있고 또 아버지는 예수님 안에 계시다」는 말씀으로 성부와 성자가 그 본질상 하나임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한 분이시니 예수님 이름으로 구하면 아버지가 들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의 단일성은 곧 삼위일체의 개념으로 확장되어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고아처럼 내버려 두지 않고 다시 오실 것이고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재림의 예언이 아닙니다. 보혜사 성령의 사역을 통한 삼위일체 하나님이 교회 공동체 안의 임재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마친 후에 문맥이 끊기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다른 주제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결국 처음에 말씀하시려다가 끊긴 것을 4장 21절에서 이어서 하시는 겁니다.

 

장황하게 13장과 14장의 문맥을 더듬어 올라간 것은 이 14장 21절이 어느 문맥에 가야 하는지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찾아보니 13장 35절까지 올라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이 뒤에 4장 21절이 오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시다가 보류된 것입니다.

 

제자들이 엉뚱한 질문으로 방해한 것 같지만, 예수님은 하실 말씀을 다 하셨습니다. 질문에 대답하시는 동안 14장에는 보혜사 성령이 언급되었고 그래서 원래 주제로 말씀하시려던 서로 사랑함의 근거가 밝혀진 것입니다.

 

인정하십니까?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천국 가기보다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것의 유일한 소망은 성령의 은혜입니다. 성령이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코드를 찾지 못하고 멍하게 듣고 있던 제자들 중에 가룟이 아닌 유다가 나서서 말합니다. 「왜 이 어려운 이야기를 세상 사람들에게는 안 가르쳐 주고 우리에게만 가르쳐 줍니까」라고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귓속말을 하듯「성령이 서로 사랑하게 해주시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주시는 비밀스러운 선물」이라고 알려주십니다.

 

인정하십니까?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락방 강화는 제자들의 삑사리 질문 사이로 성령에 의한 사랑의 은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영, 성령의 은사를 받을 것입니다. 유언 같은 다락방의 고별 설교에는 많은 주제들이 나왔지만 정작 예수님은 사랑을 말씀하시고 싶었습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없더라도 성령은 틀림없이 사랑의 능력을 가지고 존재하십니다. 그러니 우리 안을 성령으로 채운다면 서로 사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만으로 신앙은 완벽하게 완성할 수 있습니다.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고 사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랑이 신앙의 주제이고 결론이라는 것은 저에게는 절망이며 동시에 소망입니다.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을 버리지 맙시다. 성령의 충만은 곧 예수 사랑의 충만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