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신명기13:12-18
13: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거하게 하시는 한 성읍에 대하여 네게 소문이 들리기를
13:13 너희 중 어떤 잡류가 일어나서 그 성읍 거민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한다 하거든
13:14 너는 자세히 묻고 살펴보아서 이런 가증한 일이 참 사실로 너희 중에 있으면
13:15 너는 마땅히 그 성읍 거민을 칼날로 죽이고 그 성읍과 그 중에 거하는 모든 것과 그 생축을 칼날로 진멸하고
13:16 또 그 속에서 빼앗아 얻은 물건을 다 거리에 모아 놓고 그 성읍과 그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지니 그 성읍은 영영히 무더기가 되어 다시는 건축됨이 없을 것이니라
13:17 너는 이 진멸할 물건을 조금도 네 손에 대지 말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그 진노를 그치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더하사 너의 열조에게 맹세하심 같이 네 수효를 번성케 하실 것이라
13:18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정직을 행하면 이같이 되리라

 

포스트모던은 근대의 전체적 질서를 해체하고 다원성을 추구했습니다. 다양성의 가치가 절대적 가치가 된 시대에 사는 우리는 무엇에든지 회색적 발언을 해야만 젠틀한 사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선과 악의 기준이 모호해지고 놀부가 욕심쟁이인지 흥부가 무능한 것인지를 분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양성의 인정이라는 구호는 결국 사랑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책임회피를 낳았습니다.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회색적 발언으로 현대적 인간임을 어필하지만, 다양성이라는 것은 창조적 질서 안에서만 아름다운 것입니다. 출처를 모르는 다양성은 혼란스러운 현상일 뿐입니다.

 

아무도 영적으로 완전하게 독립해서 살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상이 있다는 것은 사람이 의지할 것을 찾고 있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곧 하나님 대신에 무엇인가를 믿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창조와 질서의 하나님이 아니고 혼란스러운 영적 허구입니다.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우상은 하나님의 가면을 쓴 것이고 하나님은 창조하신 인간이 그것에 예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상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인간에게 참된 행복과 축복을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인간의 힘으로 달래고 거래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상은 인간에게 요구하고 인간은 그것을 들어 주는 방식으로 대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 안에서 주고받은 것을 거래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모욕일 것입니다. 진리는 사랑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은 두렵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대안을 찾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있는 것만 같고 우상은 손에 쥘 수 있는 모습으로 바로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에 하나님의 이름표를 붙이고 그것을 섬기면 우상이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 안에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스스로 믿습니다.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나 어떤 우상도 사람을 안전하게 지켜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두려움을 없애주겠다고 말하는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인간의 두려움은 결핍 때문이고 결핍은 설계하고 창조한 주인에게로 돌아가야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죽음을 향해 등 떠밀려 가고 있는 인생이 창조주에 대한 신뢰를 가지기 전에는 결코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양한 종교 중에서 기독교만 유독 독선적이라고 하는 지적은 저에게 있어서 믿음의 근간입니다. 그것은 배타성이 아니고 절대성이기 때문입니다. 세계 안에 종교는 많지만, 절대적 존재는 하나님 오직 한 분이십니다. 시대의 기독교가 그것을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진리는 비록 외롭더라도 담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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