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15:12-23
15:12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육년을 너를 섬겼거든 제 칠년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것이요
15:13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공수로 가게 하지 말고
15:14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15:15 너는 애굽 땅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하셨음을 기억하라 그를 인하여 내가 오늘날 이같이 네게 명하노라
15:16 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하므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15:17 송곳을 취하여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영히 네 종이 되리라 네 여종에게도 일례로 할지니라
15:18 그가 육년 동안에 품군의 삯의 배나 받을 만큼 너를 섬겼은즉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5:19 너는 우양의 처음 난 수컷은 구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 네 소의 첫 새끼는 부리지 말고 네 양의 첫 새끼의 털은 깍지 말고
15:20 너와 네 가족이 매년에 여호와의 택하신 곳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을지니라
15:21 그러나 그 짐승이 흠이 있어서 절거나 눈이 멀었거나 무슨 흠이 있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잡아 드리지 못할지니
15:22 네 성 중에서 먹되 부정한 자나 정한 자가 다같이 먹기를 노루와 사슴을 먹음같이 할 것이요
15:23 오직 피는 먹지 말고 물 같이 땅에 쏟을 지니라
이스라엘은 약한 자를 보호하는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정의의 기초가 놓여지고 있습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조문의 준수를 의무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람을 대하는 의식의 성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신명기가 약자를 보호하는 율법을 제정하는 것은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을 기억하고 그것에서 구해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제도적으로 기억하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회 안에는 분명히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계층인 존재합니다. 경제적으로 부자가 있는가 하면 사회적으로 노비도 있었습니다.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선 인간은 모두 평등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았다는 것과 그들을 이끌어 내신 것은 하나님입니다. 평등하지 않던 이스라엘을 끌어내어 높은 곳에 올리셨으니 이스라엘은 그것을 제도화하여 기억하고 지키며 낮은 곳을 돌아보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억압하는 것을 싫어하셔서 해방하고 자유를 주시기를 원하며 착취하는 것을 미워하셔서 탐욕부리지 않고 나누는 것을 원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먹을 것을 가지고 일상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교회와 성도는 그것의 구체적인 실천을 위해 부름받았습니다.
*지난 번에 잘 못 올린 오늘큐티 본문 묵상을 다시 첨부합니다.
신명기QT14:이스라엘의 고용과 복리후생 20200414
가난 때문에 스스로 종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안식의 원리는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남의 집의 종이 되어 6년 동안을 일하고 나면 7년째 되는 해에 주인은 그들을 종에서부터 해방시켜 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종을 놓아줄 때는 자립할 수 있는 재정적인 도움을 주어야만 했습니다. 「그가 육년 동안에 품군의 삯의 배나 받을 만큼 너를 섬겼은즉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말라 15:18」
종은 주인의 집에서 살면서 일을 하기 때문에 당연히 일용직으로 부리는 삯군들보다 많은 일을 합니다. 주인은 그 노동력의 제공을 기억하고 개인적 자산으로 그간의 기여를 보상해주어야 합니다.
모든 것의 원천이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셨고 종들을 보내 일하게 하셨기 때문에 모든 은혜를 받을 수 있었다는 여호와의 은혜 사상은 이스라엘 안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에서「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고 했습니다. 종이 주인 앞에 종으로 서듯이 주인도 하나님 앞에서 청지기로 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종을 해방시켜 자유를 주고 물질적 배려를 하여 보내면 하나님은 약속대로 주인을 더욱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어 본 사람은 압니다. 주고 나면 그것을 이유로 더욱 많이 주시겠지만, 더 많이 받기 전에 준 것으로 이미 복을 받았다는 것을 압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는 이 명령에 순종하지 않아서 받은 벌이 있습니다. 「너희 형제 히브리 사람이 네게 팔렸거든 칠 년만에 너희는 각기 놓으라 그가 육 년을 너를 섬겼은즉 그를 놓아 자유케할지라 하였으나 너희가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너희에게 복종시켜서 너희 노비를 삼았도다 그러므로 너희가 나를 듣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한 것을 실행치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를 칼과 염병과 기근에 붙이리라 렘34:14~」
벌을 받아서 가지고 있던 것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고 원래 없던 대로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은혜 의식만이 겸손하게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수 있습니다.
혹은 종이 주인과 신뢰가 있어서 7년째가 지나도 종으로 살겠다고 할 때는 주인은 그들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이때 종의 귀를 문에 대고 송곳으로 귀 뚫어서 일생 동안 종살이하겠다는 것을 나타내는 약속의 표시로 삼습니다.
귀는 뚫려서 증표가 되고 문설주에는 찍혀서 흔적이 남을 것입니다. 종은 그 책임을 다해 살아야 하고 주인은 그 종의 삶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쓰고 버리는 세상에서 신명기에서 발견하는 노동과 인권의 보장은 선진적입니다. 모세의 법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법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법이 아니고 지금도 우리가 지켜야 하는 원천이 되는 법입니다.
신명기가 제도화한 고용과 자유, 복리후생의 근거는 15절입니다. 「너는 애굽 땅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하셨음을 기억하라 그를 인하여 내가 오늘날 이같이 네게 명하노라」
이스라엘은 억압과 가난을 경험했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의해 해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소망의 가나안에 정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내부적으로 가난한 자를 억압하고 배척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배반 행위입니다.
세상 안에 있는 부는 고정되지 않고 돌고 돕니다. 실력으로 돈을 만들어내서 부자가 된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에서 흐르고 있던 돈이 각자의 성실과 지혜의 보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다시 가난에게 부가 돌아가기도 하고 부하다가 가난의 자리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은혜를 기억하고 은혜를 나누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신명기는 사유재산과 주종의 사회적 관계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구성원 모두에게 삶의 자원과 안전보장의 제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책임을 지키되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은 공동체가 연대할 때입니다.
가난한 자를 판단하고 비판할 합리적 이유는 많습니다. 능력이 부족하고 자본이 없고 지식이 없을 수 있습니다. 또는 불성실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명기는 그러한 이유로 사회적 보장을 받지 못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도와주어야 하는 제도적인 마련을 하고 있습니다.
똑똑하고 성실했기 때문에 출애굽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상들은 노예였고 광야 40년을 지나오면서도 그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후손들을 가나안이라는 은혜로 들여보내시면서 다짐을 받고 계신 것입니다. 각자가 받은 축복을 기억하고 남의 처지를 돌아보는 삶으로의 부르심입니다.
3500년 전에 주신 하나님의 안식 원리가 인간존재를 가혹한 노동과 억압에서부터 해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와 공동체에도 안식과 해방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사회적 배려의 근거를 확인합니다.
종의 삶을 끊고 자립을 도와주는 것은 단순한 친절이 아닌 한 인생에 대한 혁명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노예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안식의 의미는 「모든 것을 멈추고 처음으로 되돌아가라」는 하나님의 회복의 명령입니다. 정당하다고 생각해 온 노예살이를 그만 시키고 당연하다고 생각해 온 노예적 삶을 그만두고 자유와 존엄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