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신명기 32:15-36
32:15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32: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32:17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의 알지 못하던 신, 근래에 일어난 새 신, 너희 열조의 두려워하지 않던 것들이로다
32:18 너를 낳은 반석은 네가 상관치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은 네가 잊었도다
32:19 여호와께서 보시고 미워하셨으니 그 자녀가 그를 격노케한 연고로다
32:20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고 그들의 종말의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종류요 무신한 자녀임이로다
32: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 하리로다
32:22 내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 음부 깊은 곳까지 사르며 땅의 그 소산을 삼키며 산들의 터도 붙게 하는도다
32:23 내가 재앙을 그들의 위에 쌓으며 나의 살을 다하여 그들을 쏘리로다
32:24 그들이 주리므로 파리하며 불 같은 더위와 독한 파멸에게 삼키울것이라 내가 들짐승의 이와 티끌에 기는 것의 독을 그들에게 보내리로다
32:25 밖으로는 칼에 방안에서는 놀람에 멸망하리니 청년 남자와 처녀와 젖 먹는 아이와 백발 노인까지리로다
32:26 내가 그들을 흩어서 인간에서 그 기억이 끊어지게 하리라 하였다마는
32:27 대적을 격동할까 염려라 원수가 오해하고 말하기를 우리 수단이 높음이요 여호와의 행함이 아니라 할까 염려라 하시도다
32:28 그들은 모략이 없는 국민이라 그 중에 지식이 없도다
32:29 그들이 지혜가 있어서 이것을 깨닫고 자기의 종말을 생각하였으면
32:30 그들의 반석이 그들을 팔지 아니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어주지 아니하셨더면 어찌 한 사람이 천을 쫓으며 두 사람이 만을 도망케 하였을까
32:31 대적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못하니 대적도 스스로 판단하도다
32:32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요 고모라의 밭의 소산이라 그들의 포도는 쓸개포도니 그 송이는 쓰며
32:33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악독이라
32:34 이것이 내게 쌓이고 내 곳간에 봉하여 있지 아니한가
32:35 보수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 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
32:3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고 그 종들을 인하여 후회하시리니 곧 그들의 무력함과 갇힌 자나 놓인 자가 없음을 보시는 때에로다

 

여수룬은 이스라엘의 다른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오직 은혜로 복을 받아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런 뒤에 그 마음을 잃고 자만에 빠졌습니다. 이스라엘은 배가 불러지면서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신명기는 그 행태를 세 가지의 행위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을 발로 차고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선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므로 선을 떠난 사람은 악의 길로 들어갑니다. 더 많은 풍요를 위해서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은 자기를 위해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만들고 그것을 섬깁니다. 마귀가 그 안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영적 간음입니다.

 

20절부터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배신의 진노를 표현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얼굴을 숨기십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 은혜와 자비가 있으나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시면 선이 보이지 않고 이스라엘의 안전과 보장도 숨어버립니다. 하나님이 부재한 것이 곧 재앙입니다. 악과 파멸과 병과 기근이 참혹할 것이고 주리므로 파리해져 독한 파멸은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출애굽기에 하나님의 이름 하나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니라 출 34:14 」질투의 하나님입니다. 여기에서의 질투는 인간이 가진 애증의 질투와 다릅니다. 하나님께 속해 있는 소중한 것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열심을 말합니다.

 

질투를 히브리어로 카나 (קַנָּא) 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성경에서 질투에도 쓰이고 열심에도 쓰입니다. 이사야 9장 7절에서 메시야 탄생의 예언 후에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할 때의 열심이 카나 (קַנָּא) 입니다. 하나님이 마귀의 손에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시던 그 열심이 질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두 의미가 충돌하지 않습니다. 사랑에 대한 열심이 질투이고 질투 안에는 끝나지 않는 사랑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배신하는 대상을 소멸하지 않고 질투하신다는 것에서 이 질투도 사랑의 일환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은 엄격하더라도 포기 당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에서 질투라는 것은 결코 부정적인 말이 아닙니다. 부부는 언약 관계 속에 있으므로 그 안에서는 사랑의 경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부부의 관계는 독점적으로 지켜져야 합니다. 그것이 선한 것입니다. 질투라는 자극적인 단어를 사용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하듯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 또한 경쟁 상대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언약 관계입니다. 사랑과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맺은 언약은 율법에 의한 언약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피로써 맺은 언약입니다. 이 또한 대체할 수 없는 사랑과 신뢰를 기반으로 합니다.

 

이스라엘의 교만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기어이 하나님의 질투와 분노를 촉발했다면 그 원인은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를 읽지 않은 이유입니다. 성경을 읽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없다거나 하나님을 모르겠다거나 하나님이 질투하고 진노하시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아침 잠언 설교는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잠18:13 」였습니다. 충분히 읽고 듣고 알아야 성찰하고 통찰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