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시128:01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128:02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시128:03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시128:0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시128:05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시128:06 네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기근과 전쟁의 시대에는 손으로 일하여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어두운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이른바 뼈 빠지게 일하여도 사랑하는 가족이 충분히 먹을 수 없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지구 반대편에는 그러한 시대를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수고한 대로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복입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개인의 근면의 결과가 아니라 타고난 시대의 복입니다.

 

세상은 손이 수고하지 않아도 돈이 굴러다니면서 돈을 벌어들입니다. 자본주의에 살고 있으니 그것을 인정하고 미워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본이 없는 노동자가 손으로 수고한 것까지 자본이 뺏어가서는 안됩니다. 돈이 사람을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손이 수고한대로 먹는 것이 복이라면 배고픈 이웃이 그 손으로 수고한대로 먹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얼마나 더 큰 복이겠습니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랑겔한스섬의 오후 (ランゲルハンス島の午後) 』에서라는 에세이집에서 「소확행(小確幸)」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입니다.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도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경쟁을 포기한 젊은 세대들의 처세의 말로 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확행이 부정적으로 흐르면 진취적 도전을 멈추고 현실 안주형 히키코모리로 주저앉기도 합니다.

 

솔로몬이 말하는 행복도 소확행입니다. 하지만 결코 실패자와 은닉자의 정신승리법은 아닙니다. 사회적 성취와 부를 위한 노력을 포기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부를 축적하고 대단한 사회적 성취를 하였더라도 실재적 행복은 살닿을 만큼 가까이 있는 소수의 사람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 보상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 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9:9 」고 했습니다. 칠백 명의 후궁과 삼백 명의 첩을 두었다던 왕의 입으로 할 말인가라는 생각도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진실한 고백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행복은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습니다. 가족과 행복을 나눌 수 있어야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소중한 것이지만 결코 작은 것은 아닙니다. 가족이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청소를 하고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는 것을 하찮은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복은 누릴 수 없게 됩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산다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도를 행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