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시작된 지 벌써 반년이 흘렀다. 모이기를 힘쓰라 하신 말씀이 무색할 만큼 교회는 모여서는 안 되는 곳이 되어버렸다. 모여서 예배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성찬의 시행은 또 하나의 문제가 되었다. 에다가와 사랑의 교회는 매달 첫째 주 주일예배에 성찬을 시행하고 있으나 팬데믹 이후 성찬식을 하지 못하고 있다. 초대교회와 종교개혁시대의 교회는 주일예배마다 성찬을 시행했다. 신학적으로 교회의 성립조건은 오직 말씀의 선포와 성례의 시행이다. 설교는 유튜브로 전할지라도 함께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의 기쁨을 언제까지 공백으로 비워두어야 하는지 그 끝이 보이지 않아 마음이 불편하다.
온라인 예배의 보급에 따라 성찬을 둘러싼 신학적 견해도 분분하다. 예배당의 방역과 거리를 유지하고 예배와 성찬을 강행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온라인으로 성찬을 시도하는 곳도 있는 것 같다. 교역자가 떡과 포도주를 가정으로 배달하기도 하고 가정에서 직접 준비하게 하기도 한다. 드라이브 스루로 떡과 포도주를 수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일본동맹기독교단에서는「온라인 예배에서의 성례전 집행의 주의」라는 제목으로 지침을 보내왔다. 함께 모여 떡과 포도주에 참여하는 성찬을 시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가능해질 때까지 연기하고 교역자에 의한 방문 성찬이나 소그룹에 의한 성찬, 그리고 온라인상의 성찬 시행은 삼가해 달라는 것이다. 온라인상의 성찬은 함께 주어진 식탁이라는 성찬의 의미와 배찬의 자격에 합당성을 확보하기가 어려워서 신학적 문제가 발생할 수는 우려 때문이다.
초대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는 성찬은 곧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성도와 함께 나누는 삶으로 전개되었고 성찬과 애찬의 구별이 없었던 시절에 고린도 교회에서 먹지 못하는 이웃을 배려하지 않은 것에 대해 바울이 엄격하게 책망했던 것을 기억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는 성찬을 통해서 예배와 선교의 공동체성을 확인하고 고양한다. 성찬이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나누고 기억하는 것이라면 성찬의 의식(儀式)을 마친 성도는 삶의 자리에서 희생과 나눔을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온전하게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에 의하면 성찬은 역사적으로 다섯 가지 명칭이 있었다고 한다. 떡을 떼는 것, 나누는 것, 감사하는 것, 먹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라틴어로 이테 미사 에스트 (ite missa est), 성찬이 끝났으니 세상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같이 모이고 떡을 떼고 감사함으로 나누고 먹고 세상으로 파송하는 것이 곧 성찬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에다가와 사랑의 교회의 어머니들은 성찬(聖餐)과 애찬(愛餐)을 할 수 없게 되자 반찬(飯饌)을 하기 시작했다. 재택근무로 인한 가족 식사의 빈도가 높아졌고 음식을 만들 때 양을 조금 많이 하면 이웃과 나눌 수 있다. 그래서 그것으로 먼저는 혼자 사시는 분들과 유학생에게 반찬을 나누고 가정들도 서로 다른 맛의 반찬을 나누어 먹는다. 물론 바쁜 사람은 무리해서 할 수 없다. 반찬 나눔이 애찬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애찬이 성찬을 대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누어 먹으라 하시고 나를 기념하라 하신 성찬의 정신을 기억한다면 작은 반찬의 나눔은 팬데믹 시대에 성찬의 기쁨을 나누는 교회와 성도의 실천이다. 오늘도 반찬(飯饌)을 만들어 성도들의 집으로 배찬(配饌)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 그들이 에다가와의 배찬위원(配餐委員)들이다. 그 거룩한 반찬을 먹으면서 회복의 날을 기다린다. 주의 백성들이 거룩한 공회로 모여 그리스도의 정하신 성찬에 참여하고 애찬으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일상의 예배가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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