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9:14~24
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9: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9: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선택적으로 받으려고 합니다. 유익할 때는 감정을 동원하여 은혜로 받지만, 불리할 때는 그것에 의문과 저항을 표시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임을 인정했다가도 다시 불공평하다고 생각되면 무관심과 시험이라는 이름으로 항의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다가 다시 그 주권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적어도 둘 중의 하나는 분명히 틀린 태도라는 것입니다. 불평을 하려면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어야 했고, 주권을 인정했다면 불평을 해서는 안 됩니다.
20절 이하에 나오는 토기장이 비유는 바울이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너희의 패리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이사야 29:16」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 아비에게 묻기를 네가 무엇을 났느냐 어미에게 묻기를 네가 무엇을 낳으려고 구로하느냐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사45:9,10」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예레미아 18:6」
질문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학습의 경험을 통해서 모르면 질문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전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질문할 수 없습니다.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전제를 가지고 있을 때 그 논증은 성립하고 타당해집니다. 결론이 타당하면서 그 전제가 실제로 참일 때 납득 가능한 논증이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다고 말하면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냐고 질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없다는 전제, 그리고 인정하지 않겠다는 전제, 논의에 평행선을 그어버리는 전제입니다. 자기 자신의 존재의 시작과 끝을 모른다는 전제를 망각한 것이고 그것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겠다는 논리적인 포기이며 영혼에 대한 무책임입니다.
토기장이의 비유는 질문하는 사람의 지적 맹점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항의하는 인간은 자신의 피조물적 한계를 인정하지 않거나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하나님에게 항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라는 전제를 가지지 않은 것입니다. 어떤 결론에도 도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불가지론에 주저앉게 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십니까라는 질문 또한 우리 주위에 항상 있습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을 믿고 싶을 테지만 정작 자신은 남들보다 우월해지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조건이 균등한 의미로 공평하지 않습니다. 많이 준 사람과 적게 준 사람의 차이가 있고 오래 사는 사람과 빨리 죽는 사람의 차이가 있습니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되 여러 형태와 목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릇의 조건이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릇이 토기장이를 취조할 수 없습니다. 토기장이가 깨어버리면 그릇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이 전제를 기억하지 않으면 세상도 인간도 하나님도 이해할 수 없어집니다.
인간의 욕심의 기준에서 하나님이 공평하시다고 아무리 주장해 보아도 스스로 모순에 걸릴 뿐입니다. 하나님이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놓여져 있는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살아 있는 자신의 존재를 전제할 때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은 세상과 하나님이 불공평 덩어리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자신의 영혼에게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공평하신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세상에 불공평해 보이면 자신의 것을 남에게 떼어주어 공평을 실천하면 됩니다.
베드로는 환상 중에 율법에서 정한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으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내가 정하다고 한 것을 부정하다고 하지 말고 받아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환상을 본 후 로마 장교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였고 그 집에 성령이 임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체험합니다.
베드로는 거기서 이방 선교가 열리는 것을 알았습니다. 천국의 열쇠를 주시겠다는 약속대로 문은 베드로가 따고 들어갔습니다.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 선교의 첫 문을 열게 하신 것입니다. 토기장이는 긍휼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바울에 의해서 로마제국 전역에 선교가 확장되어 갔습니다. 구원에 대한 이유를 묻지 마십시오.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