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9:25~33
9:25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9: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9: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9: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9: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9: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9: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9: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호세아 2장 23절을 인용해서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차별이 없음을 선언합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하리라 2:23 」
그리고 이어서 이사야 10장 22절 이하를 인용해서 차별은 오히려 유대인의 구원에게 있음을 경고합니다.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사10:22 」
이것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 사상입니다. 유대민족으로 태어나고 그 종교와 문화 안에서 성장한 것이 곧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자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혈통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구원에 합당한 믿음으로 살아남은 자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했지만, 바울은 이스라엘은 이미 그 선택을 거부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혈통과 전통 안에서 고립되어서 배타적인 구원론을 고집했습니다.
만약 그 안에 의가 있다면 빛이 밝음으로 드러나듯이 스스로 그 의로운 가치를 드러낼 것입니다. 타인을 배제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정당성과 정예의식을 채우려는 것은 이미 그 안에 의가 실종되었다는 방증입니다.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지지 못한 것이며 복음을 거부한 것이라는 겁니다.
모든 종교는 자력 구원으로 말하지만, 기독교는 타종교와는 공유할 수 없는 선명한 타력 구원의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외부에서 보기에는 기독교 신앙이 독선적으로 보일 것이고 내부에서는 그것을 양보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믿습니다. 역사 안에서 그것이 대결과 긴장의 구도가 되어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정당한 것이고 그것이 진실한 것임을 증명하려면 그 믿음의 가치를 드러내고 살고 있어야 합니다. 타종교를 비난하고 비하한다고 해서 우리가 가진 가치가 저절로 정당해지지 않습니다. 남의 것을 비난하기 전에 내가 믿는 것으로 실현할 수 있어야 그 믿음은 정당해집니다.
이방인들은 본래 의를 쫓지 않던 사람들이었지만 믿음을 가짐으로써 의를 추구하는 경건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의가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것과 하나님의 의해서만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복음의 의미가 삶 속에 의를 포기하거나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일 수는 없습니다.
복음은 의를 폐기한 것이 아닙니다. 의롭다 칭해주신 것은 의롭지 않은 사람을 불러 의의 길로 방향을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정의(定義)가 중요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라는 것은 비록 의롭지 않은 육체일지라도 의를 추구하며 사는 것으로 증명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믿음에서 난 의」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은 본래 의의 법, 즉 율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의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자신의 믿음과 인격, 그리고 구성한 사회 안에서 의로움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의의 정신은 사라지고 준수해야만 하는 의무 조항만 늘어날 뿐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그러한 결과를 「이스라엘이 부딪힐 돌에 부딪혔다」고 표현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부딪히는 돌과 걸림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구원의 예수가 구원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형식적 종교가 진실한 사랑을 만나면 어쩔 줄 몰라 하며 부딪히고 걸려 넘어질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사야 28:16을 인용하여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사28:16
정형화된 형식과 타성과 젖은 종교는 구원을 찾는 인간을 오히려 부딪히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부리가 됩니다. 그것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부딪혀서 주저앉지 않는 사람이 곧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믿음을 둘러싼 생활은 신앙의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고 곧 안락하고 편안해질 것입니다. 긴장이 줄어드는 것이 곧 매너리즘의 시작입니다. 말씀 앞으로 나와서 종교적 허물을 벗고 자신을 갱신하지 않으면 어느새 의의 껍데기만 존재하는 공허한 종교에 빠지게 됩니다.
신앙의 매너리즘은 신앙의 미니멀리즘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버릴 것과 남길 것을 정리 정돈하는 삶을 통해서 우리를 의롭다 칭해주신 하나님의 칭의를 성도의 삶을 통해서 보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