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로마서 13:8~14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성적 범죄, 상해 살인, 절도와 강도, 탐욕은 다 이웃 사랑과 관련합니다. 율법은 이것이 이웃에게 해를 입히기 때문에 금지했습니다. 처벌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웃의 안전과 평화를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곧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율법의 근본적인 목적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정신은 이타적 배려와 사랑입니다.

 

인간은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정작 아무도 사랑의 기술을 연마하지 않는다며 비판했던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대상의 문제로 취급하지만 사랑은 능력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대상에 따라 사랑의 능력이 달라진다는 것, 그것을 일반적인 사랑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한편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차별일지도 모릅니다.

 

혹 차별적으로 사랑하려는 대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지속성의 문제 또한 담보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 바뀌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대상에게 사랑과 증오가 동시에 일기도 합니다. 그래서 프롬은 사랑하는 데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사랑을 말하기 전에 먼저 인간에 대한 관찰부터 해야 합니다. 프롬은 모든 인간이 「분리 불안」을 겪고 있다고 말합니다.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근원적 분리 불안, 이별과 고독에 대한 두려움, 사회 안에서 무력한 자기 인식, 인간은 이러한 분리되고 파편화된 실존으로 불안해하는데 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외부세계와 연결하려고 합니다.

 

그 첫번째가 쾌락과 방탕의 「도취적 합일」입니다. 술, 섹스, 폭력, 마약같이 강렬하고 난폭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본문에서 바울은 이러한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13:13,14 」

 

또 하나의 출구는 「일치에 의한 합일」입니다. 전체 안에서 느끼는 안정감 같은 것입니다. 몰개성의 전체주의,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물어보지도 않고 남과 다른 자신에 대해서 불안해합니다. 거기서 자신을 규격화하고 부품화합니다. 프롬은 일치에 의한 합일은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망각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창조적 활동에 의한 합일」입니다. 예술 활동과 생산활동입니다. 생산적이고 창조적 작업을 통해서 외부세계와 연결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런 작업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고 인간의 관계성을 전제하지 않습니다.

 

프롬의 이야기가 특별히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보다 교양있는 창조적 활동을 찾아 스포츠를 하고 문화라는 코드에 접속하여 미술과 음악과 영화와 이미지를 즐깁니다. 인맥을 축적하고 연결하여 네트워크를 만들고 단체를 만들고 소속하여 멤버십을 가집니다. 동시에 은밀한 영역에서는 자신의 폭력성과 음란성이 드러납니다. 프롬에 의하면 인간의 이런 모습이 자연스럽게 분리 불안을 해소하려는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프롬이 말하려는 것은 이러한 종류의 합일로는 분리불안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프롬의 해답은 「대인간적 결합 (interpersonal fusion) 」입니다. 외부 즉 타인과의 결합, 타자와의 융합의 달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인격적 합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롬은 이제서야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에게 내재된 사랑의 욕구라는 것은 강력한 것이어서 만약 인간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발광하고 파괴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사랑하지 않으면 미치고 발광하여 파괴한다는 말은 역사와 인간을 들여다 보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어지면 그 자리에 인간성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프롬은 사랑이 일시적 감정에 홀리거나 빠지는 것이 아니며 수동적으로 받는 것도 아니고 오직 참여하는 적극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에 참여하여 자신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는 사랑을 먼저 주는 것이 곧 사랑의 기술입니다. 프롬이 말하는 사랑의 기술은 먼저 주는 것입니다. 주는 자가 복됩니다.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행20:35」

 

그리스도가 율법의 완성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죽인 범죄자를 죽이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이웃을 죽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법입니다. 법은 소극적이지만 사랑은 적극적입니다. 법은 이웃을 죽이면 처벌하지만, 사랑은 이웃을 죽이지 않게 합니다.

 

『사랑의 기술』 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까지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윤동주의 「서시」 가 생각났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모든 죽어가는 것은 역설적으로 모든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향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운명입니다. 사랑은 죽어가는 동안 살아있는 것들에게 주어진 기회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빚은 져도 됩니다. 사랑의 채무가 있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자리에서 그것을 다시 갚으면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돌고 돌아서 분리 불안을 겪고 있는 또 다른 인간들과 융합하고 연합하여 그들을 위로할 것입니다.

 

약한 것, 못된 것, 모자란 것, 보기 싫은 것, 주는 것 없이 미운 것을 다 따지면 기어이 피를 흘려야 합니다. 미움과 악독을 다 쏟아붓고 나면 마음 안에 인간성이 남아 있지 않을 겁니다. 프롬이 말하기를 사랑이 결여되면 미쳐 발광하여 파괴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 하나님의 사랑의 기술을 배워야겠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덮어주고 먼저 사랑하는 것이 기술입니다. 사랑의 기술자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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