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예레미야 30:12~24
30:1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 상처는 고칠수 없고 네 창상은 중하도다
30:13 네 송사를 변호할 자가 없고 네 상처를 싸맬 약이 없도다
30:14 너를 사랑하던 자가 다 너를 잊고 찾지 아니하니 이는 네 허물이 크고 네 죄가 수다함을 인하여 내가 대적의 상하게 하는 그것으로 너를 상하게 하며 잔학한 자의 징계하는 그것으로 너를 징계 함이어늘
30:15 어찌하여 네 상처를 인하여 부르짖느뇨 네 고통이 낫지 못하리라 네 죄악의 큼과 죄의 수다함을 인하여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였느니라
30:16 그러나 무릇 너를 먹는 자는 먹히며 무릇 너를 치는 자는 다 포로가 되며 너를 탈취하는 자는 탈취를 당하며 무릇 너를 약탈하는 자는 내가 그로 약탈을 당하게 하리라
30:1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들이 쫓겨난 자라 하며 찾는 자가 없는 시온이라 한즉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
30:1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포로된 야곱의 장막들을 돌이키고 그 거하는 곳들을 긍휼히 여길 것이라 그 성읍은 자기 산에 중건 될 것이요 그 궁궐은 본래대로 거하는 곳이 될 것이며
30:19 감사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자의 목소리가 그 중에서 나오리라 내가 그들을 번성케 하리니 쇠잔치 아니하겠고 내가 그들을 영화롭게 하리니 비천하지 아니하겠으며
30:20 그 자손은 여전하겠고 그 회중은 내 앞에 굳게 설 것이며 무릇 그를 압박하는 자는 내가 다 벌하리라
30:21 그 왕은 그 본족에게서 날 것이요 그 통치자는 그들 중에서 나올것이며 내가 그를 가까이 오게 하므로 그가 내게 접근하리라 그렇지 않고 담대히 내게 접근할 자가 누구뇨 여호와의 말이니라
30:22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30:23 보라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30:24 나 여호와의 진노는 내 마음의 뜻한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깨달으리라

 

현시대 한국 교회 상을 비판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교회에 「자정 능력」이 없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자정능력이라는 말은 생태계의 「자정작용(自淨作用)」에서 가지고 온 말인데 자연이 오염되었을 때 그것을 정화하기 위한 어떠한 인위적 처리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생태계가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바다는 스스로 깨끗하게 할 수 있는 정화능력을 가지고 있고 공기 중에서도 이 정화작용은 항상 일어납니다. 대기와 물과 토양은 폐기된 쓰레기를 생태계에 해롭지 않게 분해하고 다시 순환시키면서 정화합니다. 산 사람은 환경과 이웃을 해롭게 할 수 있지만 죽고 나면 흙으로 분해되어 더는 해롭지 않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자연이 스스로 정화하는 능력을 양으로 환산한 것을 「환경용량」이라고 하는데 문제는 이것이 무한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정 능력을 초과하면 환경은 버티지 못하고 오염되고 오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 자연의 자정 능력이 과부하에 걸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돌이키지 않으면 더 큰 재앙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자정 능력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자연이 쓰레기에 의한 오염을 인지하고 정화하는 것을 자정능력이라고 한다면 교회의 자정 능력은 죄를 인식하고 회개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회개(悔改)는 깨닫고 돌이키는 능력입니다. 자정 능력이 없다는 것은 먼저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치명적 무능에서 시작합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무능과 반성하고 다시 돌이키지 않는, 아니 돌이킬 수 없는 회개의 무능입니다. 하나님은 유다가 이미 죄의 용량을 초과하여 자정 능력을 상실했다고 진단하신 것입니다. 그동안 자연은 인간에게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고 수없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서 유다의 죄에 대해서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연의 말도 하나님의 말씀도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죄가 사고를 지배하면 도둑이 칼을 쥔 격이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버린 상태로 인간과 사회를 방치하고 나면 사고방식이 죄에게 잠식당합니다. 죄의 생각을 하게 되면 문제의식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창상은 중하도다 네 송사를 변호할 자가 없고 네 상처를 싸맬 약이 없도다 12,13」시온에 죄가 관영하여 자연적 정화가 불가능한 상태임에도 유다는 그 죄의 심각성조차 알지도 못합니다.

 

유다는 이제 고통으로 울부짖어야 합니다. 고통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강제적 정화작용입니다. 하나님의 정화의 목적은 폐기가 아니고 재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살게 하게 위해서 성도를 깨끗하게 정화하고 보전하려고 하십니다. 고집을 부리면 부릴수록 버티면 버틸수록 고통은 심화됩니다. 유다의 고통과 회복은 상반되어 보이지만 하나님의 재생 과정이라는 의미에서 같은 것입니다. 고통이 지나가고 나면 폐허가 되어 버린 야곱의 장막터는 다시 세워질 것이고 언약 백성들이 거처할 집들과 도시들이 다시 새롭게 회복될 것입니다. 탄식과 애가가 변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하는 찬양과 예배가 될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회복될 공동체를 이끌어 갈 새로운 통치자를 보내십니다. 그 통치자는 하나님의 막대기로 사용되는 이방의 압제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법을 떠나지 않고 우상을 섬기지 않는 메시아적 왕입니다. 유다공동체의 회복은 곧 하나님과 백성들의 관계 회복입니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22」하나님은 기어이 재생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