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40장 1-6절
40:1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과 유다 포로를 바벨론으로 옮기는 중에 예레미야도 잡혀 사슬로 결박되어 가다가 라마에서 해방된 후에 말씀이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40:2 시위대장이 예레미야를 불러다가 이르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곳에 재앙을 선포하시더니
40:3 여호와께서 그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으니 이는 너희가 여호와께 범죄하고 그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이 일이 너희에게 임한 것이니라
40:4 보라 내가 오늘 네 손의 사슬을 풀어 너를 해방하노니 만일 네가 나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는 것을 선히 여기거든 오라 내가 너를 선대하리라 만일 나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거든 그만 두라 보라 온 땅이 네 앞에 있나니 네가 선히 여기는대로 가하게 여기는 곳으로 갈지니라
40:5 예레미야가 아직 돌이키기 전에 그가 다시 이르되 너는 바벨론 왕이 유다 성읍들의 총독으로 세우신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들 그다랴에게로 돌아가서 그와 함께 백성 중에 거하거나 너의 가하게 여기는 곳으로 가거나 할지니라 하고 그 시위대장이 그에게 양식과 선물을 주어 보내매
40:6 예레미야가 미스바로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나아가서 그 땅에 남아 있는 백성 중에서 그와 함께 거하니라
바벨론 왕 느부겟네살이 예레미야를 선대하라고 했지만 예레미야는 포로에 포함되어 라마까지 호송됩니다. 라마는 예루살렘에서 8km 정도 떨어진 포로들의 집결지였습니다. 31장에서 라헬이 통곡했다고 표현한 곳, 통곡하는 포로들이 출발하기 전에 그 가운데 있던 예레미야를 발견한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레미야를 석방합니다. 예레미야가 바벨론으로 함께 간다면 포로가 아닌 자유인으로 선대할 것이나 예레미야가 유대에 남기를 원한다면 그 의지대로 놓아주겠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예레미야서의 주제를 보란 듯이 정리하는 한 문장이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데 그것이 예레미야가 아니고 바벨론 시위대장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시위대장이 예레미야를 불러다가 이르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곳에 재앙을 선포하시더니 여호와께서 그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으니 이는 너희가 여호와께 범죄하고 그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이 일이 너희에게 임한 것이니라 40:2,3」
파괴자의 어이없는 훈계를 듣고도 예레미야가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은 바벨론이 승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진영의 논리가 아니라 양심과 진실 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듯이 예레미야도 유다 백성의 안전을 위해서 예언한 것이지 바벨론을 침략과 파괴를 돕기 위해서 예언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예레미야가 바벨론으로 가서 특혜를 누릴 이유는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결코 친 바벨론파가 아닙니다. 애굽을 믿고 안전하다고 우기던 자들이 친 애굽이었을 뿐입니다. 예레미야야말로 진정 유대를 사랑했던 선지자입니다. 바벨론은 예레미야에게 특혜를 약속했지만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가지 않고 유대에 남아 미스바로 갔습니다.
일본인 중에 전쟁 책임, 위안부 문제 등에 있어서 양심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국은 그들을 친한파 또는 지한파 등으로 구분합니다. 교단에서 교제하는 일본인 목사님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에 사과하고 일본 사회에 쓴소리를 하는 분들입니다. 그럴 때마다 어떤 한국인들은 그들이 한국을 좋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고 일본에 대한 추가적인 험담을 늘어놓습니다.
물론 그들이 한국을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일본이 싫고 한국이 좋아서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국 일본을 사랑합니다. 다만 의와 불의를 구별하고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기 때문에 국가와 민족, 소속과 진영을 초월하여 잘 못 한 것을 잘 못 했다고 인정하는 것뿐입니다. 편협한 민족주의보다 인류애를 더 사랑하고 체제로서의 국가보다 하나님 나라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사과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민족주의에 빠진 한국 교회는 그런 발언을 확대하여 일본을 비난하고 한국을 정당화하는 정치적인 목적에 사용합니다. 「보라 일본인도 일본을 비난하지 않는가」라는 논리를 선전하기 위해서 그들의 고백과 사과를 악용하는 것입니다. 민족주의를 극복한 양심 발언을 피해 의식을 정당화하려는 또 다른 민족주의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양심에 대해서는 양심으로 대하여야 합니다.
예레미야서의 회개의 초점은 바벨론에게 있지 않고 유다에게 있습니다. 회개는 유다가 해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자신의 조국을 잿더미로 만든 바벨론을 좋아할 리 없습니다. 바벨론은 예레미야가 친 바벨론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친 바벨론파였던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양심과 진실을 위해 일했을 뿐입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 양심에 따라 바벨론의 특혜를 거절하고 잿더미가 되어버린 유대에 남아 남겨진 자들과 함께 통한의 시간을 보냅니다.
*10월의 시작의 날에 추석을 맞았습니다. 집을 떠나 고향으로 갈 수 없는 처지는 바벨론 유수 시대를 살았던 유다 백성이나 코로나 시대를 사는 우리 재외국민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발이 묶어 오 가지 못하지만 사랑하는 가족들의 안전과 평강이 지켜지기를 기도합니다. 행복하고 풍성한 추석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