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52:1~11
52:1 시드기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일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하무달이라 립나인 예레미야의 딸이더라
52:2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
52:3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진노 하심이 그들을 그 앞에서 쫓아내시기까지에 이르렀더라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하매
52:4 시드기야 구년 시월 십일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그 성을 대하여 진을치고 사면으로 흉벽을 쌓으매
52:5 성이 시드기야 왕 십일년까지 에워싸였더니
52:6 그 사월 구일에 성중에 기근이 심하여 그 땅 백성의 식물이 진하였더라
52:7 갈대아인이 그 성읍을 에워쌌더니 성벽을 깨뜨리매 모든 군사가 밤중에 두 성벽 사이 왕의 동산 곁문 길로 도망하여 아라바길로 가더니
52:8 갈대아인의 군대가 시드기야 왕을 쫓아가서 여리고 평지에서 미치매 왕의 모든 군대가 그를 떠나 흩어진지라
52:9 그들이 왕을 잡아가지고 하맛 땅 립나에 있는 바벨론 왕에게로 끌고가매 그를 신문하니라
52:10 바벨론 왕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목전에서 죽이고 또 립나에서 유다의 모든 방백을 죽이며
52:11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다가 그 죽는 날까지 옥에 두었더라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망하고 남유다는 기원전 586년에 바벨론에게 멸망합니다. 여기서 136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차가 발생합니다. 136년이라는 기간은 남유다가 북이스라엘을 반면교사를 삼아 스스로를 돌이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남유다는 북이스라엘 멸망 사건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망할 만 해서 망한 것이고 자신들에게는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있고 솔로몬의 성전이 있으며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 왕조의 정통성이 있기에 환란은 없을 것이고 평안만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생각의 나태가 만든 왜곡입니다. 생각이 게으르면 자구지책으로 자기합리화와 왜곡을 일삼게 됩니다. 나태가 반복되면 고집스러운 편견의 상태가 되는데 이것을 정신병리학에서 망상장애라고 합니다.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서 성전에 가서 선택받고 구원받은 선민의 자부심만을 되뇌이고 그것에 합당한 보호를 요청하고 나면 그것이 마치 사실인 양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는 대개 목소리가 크고 믿음의 확신을 웅변하지만 진정성은 말의 웅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는 삶의 방식에 있습니다. 말씀은 있었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확신한다는 것은 곧 나를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믿음을 확신해 버리니 하나님의 뜻이 의심스러운 것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유다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자기성찰의 기회로 삼지 않고 자기도취의 늪으로 삼았습니다.
남유다는 왜곡된 언약 이데올로기, 구원 프레임 안에 갇혔고 그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장애에 걸려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 확신의 상징인 성전을 파괴하셨고 자부심의 상징인 다윗 왕조의 시드기야를 비참하게 몰락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불신앙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왜곡된 믿음의 확신을 파괴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서의 마지막 부분을 잃고 있습니다만 하나님이 파괴하신 것은 유다라는 국가도 아니고 시드기야라는 왕도 아닌 것 같습니다. 도무지 바뀌려고 하지 않는 영적 나태를 파괴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대 근동의 지축을 흔들었던 바벨론의 보병전과 우리가 직면한 코로나라는 세균전은 둘 다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구원 이데올로기 안에서 게으른 생각만 확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