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베드로후서 2장 1~11
1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2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3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5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7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8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10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11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주 앞에서 저희를 거스려 훼방하는 송사를 하지 아니하느니라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하는 권면을 했던 것은 교회가 거짓된 가르침을 분별하고 그것과 싸우기 위해서는 탁월한 기독교적 교양을 가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와 교사를 구별하는 것은 그 교양과 덕성 안에서 가능해집니다. 무엇을 믿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성문화된 교리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사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라고 했던 여덟 가지 권면의 마지막은 사랑이었습니다. 가르치려고 하는 교리가 어떻게 다른가의 문제에 앞서 거짓 선지자와 거짓 교사의 동기는 탐욕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의 동기가 드러낸 결과를 나열합니다. 호색과 탐심과 무법과 음란과 육체를 따르는 더러운 정욕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언어에서 베드로의 분노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해석의 실수가 아닙니다. 종교적 리더십을 가졌던 동기가 탐욕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당연한 결과로 드러난 것입니다. 용서하거나 선처할 수 있는 성질의 죄가 아닌 것입니다.

 

종교적 영역 안에서 일어나는 성적 범죄와 이탈은 실수가 아닙니다. 행동의 실수가 아니고 동기와 목적이 불순하기 때문에 때가 되어 행동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만약 실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더라도 사회법으로나 교회법으로나 책임을 져야합니다. 그런데 실수라고 하면서 가르치는 자리에 머무르려고 한다면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를 치리하지 않고 비호하는 노회나 교단은 이미 이익집단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세상법이나 교회법이나 그것을 위임받은 자들이 집단이익의 수단으로 법을 사용한다면 진실은 드러나지 못하고 공의는 세워지지 못합니다. 세상의 눈을 가릴 수는 있으나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문제의 발단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무서운 것이 없었습니다. 재림도 종말로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에피쿠로스학파의 쾌락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물은 원자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결국에는 해제된다는 과학적 환원주의입니다. 무신론은 아닙니다. 그러니 종교 안에 들어왔습니다. 신은 있으나 신은 인간에게 개입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심판도 믿지 않습니다. 따라서 두려움과 죄책감 없이 쾌락의 삶을 추구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가지고 죄와 율법에 지친 사람들을 속이기는 쉽습니다. 말 잘하는 사람, 논리적으로 말하는 사람, 설득력 있게 말하는 사람, 재미있게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것이 반드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에 논리가 있지만 성도는 영을 분별해야 합니다.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끝이 없는 것에는 어떤 의미도 담을 수 없습니다. 죽음과 심판과 종말은 저주가 아닙니다. 죽음이 없이는 의미있게 살 수 없고 종말과 심판이 없이는 사람답게 살 수 없습니다. 끝이 반드시 있으나 성도에게 두려움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