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편1-6
13: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13:2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13: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13: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13:5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13: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2007년 영화 『밀양』이 나왔을 때 교회는 이 영화가 안티 기독교 영화이니 보지마라고 하였고 그 말을 들은 나는 호기심에 당장 가서 봤습니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꼭 봐야 할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에서 시골 남자역을 했던 송강호의 대사를 인상 깊게 기억합니다. 주일에 교회 안 가면 찝찝하고 가면 쪼매 마음이 편하고…
「예배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벌을 주시면 어떻게 할까」그것이 걱정이 되어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나 하나님에 대한 미숙한 이해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출애굽기 읽으면서 배운 안식일에 관한 율법은 종교적 행위를 요구한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행할 바를 말한 것입니다. 안식하게 하시고 예배하게 하신 것은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안식일 준수라는 의무사항으로 인간을 옥죄게 만들겠지만 하나님의 근본적인 목적은 인간이 인간의 자리에서 자유와 안식을 누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잘하여 상을 받는 것과 무엇을 잘 못하여 벌을 받는 것보다 중요하고 두려운 것은 나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징계는 아직 괜찮습니다. 하나님의 무관심이야말로 지옥입니다. 지옥을 정의한다면 하나님의 자비가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에서 떠나 하고 싶은 일 다하고 살아도 돈도 잘 벌고 건강하고 좋은 일만 생기니 하나님에 대하여 둔감해진다면 그것이 이미 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를 제일 먼저 기도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13편에서 다윗은 가장 먼저 하나님이 자신을 잊어버렸을까 봐 그것이 두려워서 호소합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1」 이것을 3절에서는 「사망의 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고 영적인 죽음입니다. 다윗은 지금 겪고 있는 삶의 무게보다 하나님이 부재하다는 불안감이 더 무거운 것입니다. 고통이 계속되면 믿음까지 고갈될까 봐 두렵습니다. 「믿쉽니다!」 라고 외치는 것의 대부분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믿음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음」의 가장 유사종교는 「나의 믿음을 믿음」입니다.
믿음에 있어서는 나는 나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육체가 약하므로 공격당하고 유혹당하면 믿음이라는 것도 항상 위험합니다. 나의 믿음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항상 드립니다. 「하나님! 저는 육체도 믿음도 약하니 불쌍히 여겨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다윗의 시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5」 다윗은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겠다고」 했습니다. 주의 사랑이란 바로 조건 없이 베푸시는 자비, 자격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그것을 기억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곳으로 가신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기억하는 마음 안에서 살아 나오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