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욥기 3장 11~26
3:11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3:12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유방이 나로 빨게 하였던가
3:13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3:14 자기를 위하여 거친 터를 수축한 세상 임금들과 의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3:15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에 채운 목백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3:16 또 부지중에 낙태한 아이 같아서 세상에 있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못한 아이들 같았었을 것이라
3:17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으며
3:18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3:19 거기서는 작은 자나 큰 자나 일반으로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3:20 어찌하여 곤고한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번뇌한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3:21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그것을 구하기를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더하다가
3:22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3:23 하나님에게 둘러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3:24 나는 먹기 전에 탄식이 나며 나의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것같구나
3:25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몸에 미쳤구나
3:26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은 욥을 시험하기 위한 특별한 사건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만 고난을 주신 것이 아니고 모든 인생에게 허무와 고생의 시간을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온 인생은 누구라도 욥의 고민과 질문을 똑같이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없이는 인간은 참 안식을 구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욥이 존재를 부정하고 삶에서 회의를 노래하는 것은 고통에서 벗어나서 참다운 안식을 취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안식을 찾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고 고생의 인생길에서 인생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인생은 모두 안식을 찾아 헤매지만 몸이 편한 상태를 안식으로 오해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구하여야 하는 안식은 그런 것이 아닐 겁니다. 병원의 환자들은 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약해진 육체의 간절한 바람의 말은 「집에 가자」입니다. 병원에 있는 인간은 다 불안합니다. 그래서 내가 살던 곳, 가족과 함께 먹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안식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 26」 그런 의미에서 사람은 모두 죽어가고 있고 모든 사람은 욥의 신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욥기의 대부분은 시입니다. 인간의 질문을 담은 것들 즉 문학과 철학과 예술 그리고 신학까지도 그 원초적 주제는 인생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것을 공부하면 취직을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삶을 고민하면 삶을 박탈당합니다. 돈을 고민해야만 살 수 있습니다. 당장 현금화할 수 있는 기술과 투자만이 사회적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니 인간군상은 갈수록 안식이 무엇인지 모르고 안식을 잃어갑니다. 안식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합니다. 성경에는 지옥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습니다. 그것은 현실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지옥을 볼 수 있기 때문은 아니겠습니까?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음성과 말씀에 순종치 않으면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출애굽 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식에 들지 못한 사례로 소개합니다. 제일 원통한 사람들입니다. 고생은 제일 많이 하고 안식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입니다. 욥이 구하는 안식, 아니 하나님이 욥에게 구하게 하시는 안식은 욥이 고난받기 전의 일상의 회복이 아니라 인생과 하나님을 재발견하면서 찾아내는 안식입니다.

음악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RYpHStRvj8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