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욥기 4장 1~11
4: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가로되
4:2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염증이 나겠느냐 날지라도 누가 참고 말 하지 아니하겠느냐
4:3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교훈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면 강하게 하였고
4:4 넘어져 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4:5 이제 이 일이 네게 임하매 네가 답답하여 하고 이 일이 네게 당하매 네가 놀라는구나
4:6 네 의뢰가 경외함에 있지 아니하냐 네 소망이 네 행위를 완전히 함에 있지 아니하냐
4:7 생각하여 보라 죄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4:8 내가 보건대 악을 밭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4:9 다 하나님의 입기운에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4:10 사자의 우는 소리와 사나운 사자의 목소리가 그치고 젊은 사자의 이가 부러지며
4:11 늙은 사자는 움킨 것이 없어 죽고 암사자의 새끼는 흩어지느니라

 

욥은 그 행사가 하나님께 칭찬받을만한 의인이었지만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고 욥의 친구인 엘리바스는 욥의 고난을 근거로 욥이 의롭지 않았음을 고발합니다. 욥에게 죄가 없는데 하나님이 이런 저주를 하셨겠는가라는 논리입니다. 욥이 형통할 때 욥 자신도 고난당하는 사람에게 인내를 가르쳤으니 그도 고난 가운데서 인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은 맞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해는 부족합니다. 「내 말이 틀렸어?」 이것이 자기 안에 갇힌 사람의 논리입니다. 그것만 놓고 보면 물론 틀리지 않습니다. 돌아보아 자신을 성찰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리라는 것은 하나의 이치라는 뜻입니다. 많은 이치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입니다.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우는 아이 뺨을 때리는 것이 가혹해 보입니다.

 

남에게 회개하라는 말은 쉽게 할 수 있지만 이웃의 고통을 공감하는 사랑은 어려운 일입니다.
게다가 욥의 고난은 욥의 잘못에 대한 벌은 아닙니다. 엘리바스는 비판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사건을 분석하고 있지만 공감이라는 잣대는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것만을 절대화하는 사람을 「꼰대」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공식으로 세상의 모든 일에 대입하여 답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2:15」 고 했습니다. 일리에 따라 따지는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한 마음을 공감하는 능력입니다. 친구들이 행위에 대해서 추궁하니 욥은 행위에 대해서 결백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엘리바스에게 악의는 없어 보이지만 욥은 그것으로 인해 더 고통스러워합니다. 가르치는 말보다 이해하고 공감하는 말을 더 많이 배우면 좋겠습니다.

음악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Z-gNpap6v6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