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욥기 6장 14~30
6:14 피곤한 자 곧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를 그 벗이 불쌍히 여길 것이어늘
6:15 나의 형제는 내게 성실치 아니함이 시냇물의 마름 같고 개울의 잦음 같구나
6:16 얼음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취었을지라도
6:17 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나니
6:18 떼를 지은 객들이 시냇가로 다니다가 돌이켜 광야로 가서 죽고
6:19 데마의 떼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
6:20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리고 낙심하느니라
6:21 너희도 허망한 자라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
6:22 내가 언제 너희에게 나를 공급하라 하더냐 언제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로 예물을 달라더냐
6:23 내가 언제 말하기를 대적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포악한자의 손에서 나를 구속하라 하더냐
6:24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6:25 옳은 말은 어찌 그리 유력한지, 그렇지만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뇨
6:26 너희가 말을 책망하려느냐 소망이 끊어진 자의 말은 바람 같으니라
6:27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벗을 매매할 자로구나
6:28 이제 너희가 나를 향하여 보기를 원하노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하지 아니하리라
6:29 너희는 돌이켜 불의한 것이 없게 하기를 원하노라 너희는 돌이키라 내 일이 의로우니라
6:30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궤휼을 분변치못하랴

 

엘리바스가 구구절절이 할 수 있는 말을 하였지만 엘리바스는 욥에게서 사실관계의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쩌면 욥의 대답은 엘리바스에게 하는 말이지만 자신의 중심을 알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호소일지도 모릅니다. 사람 속을 누가 알아서 그 마음을 짐작하여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특히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진실함에 대해서는 사람이 그것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행하면 칭찬받을 일보다 오해받을 일이 더 많습니다. 물론 위선과 가식 또한 사람의 육안으로 쉽게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까지도 행위와 열정에 따라 서열화하기를 좋아하지만 사람의 영혼 안에 있는 믿음을 측정하려고 하는 것이 무리한 것인지 모릅니다.

 

헌법에 「무죄추정의 원칙」이 있습니다. 유죄가 확정될 때까지 피고인을 무죄로 간주하라는 것입니다. 수사하는 사람의 경험이나 심증이 있어도 혐의만으로는 범죄자 취급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혹시 유죄의 정죄를 놓치는 일이 있더라도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억울한 일이 없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욥의 변론은 정당합니다. 정의를 말하는 친구들에게 사실을 말해주어야 할 테니까요. 친구들은 심증이 자기 안에서 확신이 되어 자기 논리를 만들어 가고 있지만 욥에게는 신학적 고민이 축적되고 있습니다. 인간을 설명할 수 없듯이 고난을 하나님의 형벌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발견입니까?

 

욥에 대한 오해는 곧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오해입니다. 나를 둘러싼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인간에게는 무죄 추정의 원칙을 적용해야겠습니다. 내가 만든 추정과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확증편향을 버리고 이해와 위로의 말을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속는다고 하여도 나는 나의 일을 하였으니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음악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btlFT7hVZo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