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욥기 11장 1~11
11:1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가로되
11:2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입이 부푼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11:3 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으며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
11:4 네 말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의 목전에 깨끗하다 하는구나
11:5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11:6 지혜의 오묘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너는 알라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니라
11:7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11:8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 하겠으며 음부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11:9 그 도량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11:10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개정하시면 누가 능히 막을소냐
11:11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치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

 

세 번째 친구 소발 또한 도식적 인과응보론에 치우쳐 있는 사람입니다. 욥의 고난은 그 원인이 죄에 있으니 회개해야 한다고 비난합니다. 소발은 앞의 두 사람에 비하면 훨씬 노골적이고 공격적입니다. 소발이 말하는 의로움, 부끄러움, 정결, 하나님의 말씀, 지혜의 오묘, 지식의 광대하심, 하나님의 징계, 전능자, 하늘보다 높으시고 음부보다 깊으신 하나님, 도량이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으신 하나님 등등의 표현은 과연 소발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지식일까요? 마음으로 배운 지식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귀로 듣고 입으로 따라 하는 말입니다.

 

그런 이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말하기를 좋아하지만 그 안에 정죄의 목적이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 같지만 자기 방종과 불순종을 합리화하고,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말하는 것 같지만 자신은 무책임합니다. 믿음의 언어에 추상언어가 많으면 그렇게 됩니다. 원나라 때의 『선림유취(禪林類聚)』에 「수미산(須彌山)은 높아 봉우리를 볼 수 없고 큰 바닷물이 깊어 바닥이 보이지 않네. 흙 털고 먼지 날려 봐도 찾을 수 없고 고개 돌리다 부딪히니 바로 나 자신이네」라는 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경을 읽으면서 진리를 찾아보지만 높고 넓은 경지는 찾아내지 못하고 돌아서니 마주하는 것은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자기 자신이다」는 말입니다. 말로는 진리를 찾는다고 하지만 겉으로만 돌다가 끝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가당착(自家撞着)」의 유래입니다.

 

하나님을 도용하며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을 뿐입니다. 소발의 말이 틀리지 않을 것 같으나 자가당착이라서 그 말에 힘이 없습니다. 우리 안에 정의되지 않은 추상적 언어가 사라진다면 아마도 큰 공백이 생길 겁니다.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가 아주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실체를 알기 위해 고민을 시작하는 것이 교회의 과제입니다. 그런 교회와 믿음의 고백은 건강해질 것입니다.

음악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nt-ZtD53x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