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3장 1~19
13:1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통달하였느니라
13:2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한 내가 아니니라
13:3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13:4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데 없는 의원이니라
13:5 너희가 잠잠하고 잠잠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13:6 너희는 나의 변론을 들으며 내 입술의 변명을 들어 보라
13:7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 그를 위하어 궤휼을 말하려느냐
13:8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좇으려느냐 그를 위하여 쟁론하려느냐
13:9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임 같이 그를 속이려느냐
13:10 만일 가만히 낯을 좇을진대 그가 정녕 너희를 책망하시리니
13:11 그 존귀가 너희를 두렵게 하지 않겠으며 그 위엄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겠느냐
13:12 너희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너희의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니라
13:13 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임하든지 내가 당하리라
13:14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13:15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
13:16 사곡한 자는 그의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13:17 너희는 들으라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설명을 너희 귀에 담을지니라
13:18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스스로 의로운 줄 아노라
13:19 나와 변론할 자가 누구이랴 그러면 내가 잠잠하고 기운이 끊어지리라
친구들은 원칙론에 입각해서 욥의 허점을 찾으려고 고민하고 있지만, 욥은 필사적인 신학적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욥이 죄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말은 아닐 겁니다. 욥은 항상 자신과 가족의 문제를 찾아 번제를 드리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 인식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욥은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과 연결할만한 죄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무죄의 항변이라기보다 원인을 규명하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내가 못나서 그런 것이라고 해버리면 언뜻 회개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 있는 내용은 찾아낼 수가 없게 됩니다. 욥의 친구들의 무책임한 공격과 달리 누군가가 욥의 죄를 납득 가능한 방법으로 입증해 준다면 욥은 그 책임을 지고 죽겠다고 말합니다.
문제를 알지 못한다면 자신이 언젠가 회복되었을 때 무엇을 바꾸어야 할지 알지 못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행위에 의한 결과라는 것은 있습니다. 어제 어떻게 살았는가가 내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할 것입니다. 반성하고 돌이켜야 되는 문제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인 죽음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 시기에 대해서도 이유에 대해서도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반성해서 돌이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하게 사용해서는 안 되듯이 고난에 죄책하고 좌절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앞으로 만나야 할 고난이 어떤 형태의 고난일지 모르지만 그것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허락된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욥은 재판장인 하나님 앞에 서 있는 피의자이고 친구들은 없는 죄를 만들어 기소하려는 검사들 같습니다. 참소하는 자, 거짓말하는 자, 정죄하는 자들 사이에서 죄책하고 좌절하기만 한다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의 길을 갈 때라도 그것이 내 죄일 때든지 아닐 때든지 그것이 죄에 의해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줄 변호사가 옆에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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