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0장 16~31
30:16 이제는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녹으니 환난날이 나를 잡음이라
30:17 밤이 되면 내 뼈가 쑤시니 나의 몸에 아픔이 쉬지 아니하는구나
30:18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하여 옷이 추하여져서 옷깃처럼 내몸에 붙었구나
30:19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로 티끌과 재 같게 하셨구나
30:20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나 주께서 대답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굽어보시기만 하시나이다
30:21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히 하시고 완력으로 나를 핍박하시오며
30:22 나를 바람 위에 들어 얹어 불려가게 하시며 대풍 중에 소멸케 하시나이다
30:23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끌어 가시리이다
30:24 그러나 사람이 넘어질 때에 어찌 손을 펴지 아니하며 재앙을 당할 때에 어찌 도움을 부르짖지 아니하겠는가
30:25 고생의 날 보내는 자를 위하여 내가 울지 아니하였는가 빈궁한 자를 위하여 내 마음에 근심하지 아니하였는가
30:26 내가 복을 바랐더니 화가 왔고 광명을 기다렸더니 흑암이 왔구나
30:27 내 마음이 어지러워서 쉬지 못하는구나 환난 날이 내게 임하였구나
30:28 나는 햇볕에 쬐지 않고 검어진 살을 가지고 걸으며 공회 중에 서서 도움을 부르짖고 있느니라
30:29 나는 이리의 형제요 타조의 벗이로구나
30:30 내 가죽은 검어져서 떨어졌고 내 뼈는 열기로 하여 탔구나
30:31 내 수금은 애곡성이 되고 내 피리는 애통성이 되었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은 먼저 사람이 그것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무관심 때문이고 그다음은 들어도 알지 못하는 난청의 문제 때문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는 침묵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침묵하시는 것은 인간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사이에 고통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침묵은 인간에게는 곤란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던 행복의 시간이 주어지듯 피하고 싶은 고통의 시간도 면제되지는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고통은 두렵고 피해가고 싶은 것이지만, 사실 고통은 인생 안에 정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통은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비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지만 하나님 없이, 하나님 몰래, 하나님의 생각과 다르게 주어지는 고통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침묵 같지만, 뒤집어 보면 기쁘고 즐거울 때도 그 이유에 대해서 하나님이 침묵하셨던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때는 사람이 따져 묻지 않았을 뿐입니다. 돌아보니 행복에도 고통에도 내가 살아있다는 이유 말고는 내가 납득할 만한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고통은 아프지만 원래 있는 것입니다.
17세기 막부의 기독교 탄압을 그린 엔도 슈샤쿠의 『침묵』은 인간이 고통받을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절규입니다. 책 제목은 그 절규의 다급함과는 상반된 이름, 「침묵」입니다. 그 침묵은 웅장한 소리보다도 무겁게 인간의 실존을 짓누를 것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동안에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죽어갑니다. 왜 침묵하십니까라고 원망해보지만, 대답은 침묵입니다.
그러나 침묵은 침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침묵 안에는 삶에 고통이 있다는 대답이 들어있습니다. 침묵의 원제는 『인생의 후미에』입니다. 성모와 그리스도의 얼굴을 밟고 산 사람이나 그러지 못해서 죽은 사람이나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후미에는 고통이었고 그렇다면 제목은 「인생의 고통」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침묵」과 「인생의 고통」이 같은 제목이 아니겠습니까.
무질서한 분자들이 반복된 혼란 속에서 일정한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을 「결정체」라고 합니다. 조개 속으로 들어온 이물질로부터 살을 보호하기 위한 조개의 필사의 노력이 「진주」를 만들어 냅니다. 욥을 비롯한 모든 고통당하는 인생이 불쌍하지만 의미 없는 고통은 없습니다. 고통은 우리 인생에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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