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시편 55:16~23
55:16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55:17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소리를 들으시리로다
55:18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저가 내 생명을 구속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55:19 태고부터 계신 하나님이 들으시고 (셀라) 변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리로다
55:20 저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 언약을 배반하였도다
55:21 그 입은 우유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55:23 하나님이여 주께서 저희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저희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개인적으로 묵상을 위해서는 확보된 시공간이 필요해서 이동이 많았던 지난 몇 주간은 무언가를 쓰지 못했습니다. 우리집이 있는 곳은 우리나라가 아니고, 우리나라에 돌아가도 우리집이 없어서 안식하기 어려웠습니다. 말씀 앞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내 안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역시 생각은 산만해지고 불안은 가중됩니다. 설레임으로 시작한 여행은 귀가의 안도로 끝납니다. 세상으로 외출하지만 말씀이 있는 아버지의 집으로 회귀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영혼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시간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주님과 함께하는 이 고요한 시간」을 기준으로 다시 헤쳐모여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는 상황을 이길 힘이 내재해 있다고 믿습니다. 잘 나갈 때 교만해지기 쉽고 위기에 처했을 때 낙심하기 쉬우나, 높아질수록 오히려 겸손하고 위태로울 때일수록 더욱 용기를 내야 합니다. 그렇게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믿음에는 본래 그런 능력이 들어있습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소리를 들으시리로다 17」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근심하고 탄식하는 것은 위기와 실패라는 상황 때문이 아니라 존재의 절망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은 불안을 느끼고 절망을 경험하는 존재입니다. 놀랍게도 불안이라는 구멍을 메워보아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불안한 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불안이 존재의 증거입니다. 불안하지 않으면 불안하지 않는 것 때문에 불안해합니다. 그 불안의 구멍은 하나님으로만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안을 느끼는 인간에게만 하나님의 은혜는 실재가 됩니다. 스스로 불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은혜로 인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실존적인 절망과 위기를 가진 인간은 불안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야만 평안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감격은 거기서만 실재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고 있지 않은 인생은 이미 어떤 우상을 붙들고 살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믿을만한 것이 있기에 불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래서 탄식하고 탄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만입니다. 아침에 일어난 인간은 나는 절망적인 사람이라고 고백해야 하고, 정오의 뙤약볕 아래에 서서 나는 삶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고백해야 하고, 저녁에 돌아와 하나님의 구원을 애원해야 합니다. 멋들어진 감사기도는 오히려 내 영혼을 감추고 있는 위선일지도 모릅니다. 살려달라고 해야 합니다.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실존적 절망의 시점을 일상에서 회복시키는 것이 겸손의 실력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16」 주님과 함께하는 이 고요한 시간에 절망을 토로하는 것이 소망의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