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14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1: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1: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1: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바울서신을 읽다가 요한복음을 읽으면 저자의 차이가 분명하게 느껴집니다. 바울의 글은 조직적이고 논리적이지만 요한의 글은 논리성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적인 글입니다. 그런 이유로 2세기 교부 알렉산드리아 클레멘트는 “다른 세 복음서를 몸이라 한다면 요한이 전한 복음서는 그 정신이다.” 라고 했습니다.

 

요한의 영성은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보아도 차이가 납니다. 사복음서가 가지고 있는 각각의 관점은 다릅니다. 요한복음을 제외한 마태, 마가, 누가의 복음서를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각각 예수님을 왕과 종과 인간이라는 다른 관점에서 묘사하고 있지만 이 세 복음서는 적어도 공통적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절대 신성을 지니신 분임을 강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은 홀로 공관복음과 구별됩니다. 요한복음 안에서 예수님은 명백하게 하나님과 동일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하나님되심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읽는 사람이 영성의 문을 열고 읽지 않으면 요한의 메세지는 들리지 않습니다.

 

설명이나 설득의 방법으로는 복음의 핵심으로 파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에 관해서는 선언하여야 합니다. 묻지마 신앙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질문해야 하고 더 많이 알아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지적체계 안에 갇히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럴 수도 없고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미 믿음의 대상이 아니게 됩니다.

 

이 영성에 대해서는 바울도 통렬한 경험을 통해서 인정한 바 있습니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철학적이고 사변적으로 전도하여 실패를 했습니다. 이후 바울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했습니다. 즉 전도라는 것은 연역적인 복음선언이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저는 29살에 처음 복음을 듣고 얼마간 저를 전도하던 교회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것을 즐겼던 것 같습니다. 내가 합리성과 논리성으로 공격하면 대부분의 경우에 간단하게 이길 수 있었습니다. 전도자들은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합리적으로 증명해 주지 못했고 저의 고집과 궤변은 승리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제가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낸 것도 아니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혼자 남겨진 시간에 전도자들이 남겨놓고 간 성경구절들이 저의 귀전에 맴돌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논리적으로 말하지도 않았고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종교성에 함몰된 편협한 신념같았습니다.

 

전도자들은 내가 받아들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언했습니다. 그 때 저는 항의했습니다. 나는 믿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성경의 구절을 제시해도 그것은 나에게 객관적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라고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저녁에는 그 들었던 말씀이 자꾸만 생각났습니다. 내 마음에는 그 말씀들이 들어와 일하고 있었습니다. 저를 설득하려 했던 말이라면 다시 생각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은 20장31에서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회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사람들로 믿도록 하는 것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일화와 유년 시절에 대한 짧은 이야기조차도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뒤집어서 말하면 요한이 이 글을 기록할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에베소에서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인 A.D. 80-90년은 심각한 박해 상황이었고 그런 믿음과 교회의 위기의 시대에 요한은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이라는 신앙의 근간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요한복음을 기록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성자 예수가 영원 전부터 성부와 함께 계셨고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구속 사역을 완수하신 후 승천하여 다시 성부 하나님께로 돌아가셨다고 증거합니다. 예수님의 선재, 성부성자의 일체, 성육신, 십자가의 구속, 승천, 이 모든 것이 다 인간의 인식의 범위를 초월하는 것들입니다. 이것이 요한의 언어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아버지’ 라고 하는 단어가 쉬지 않고 나옵니다. 물론 예수님의 발언입니다. 이것은 곧 성자에 의한 성부의 계시이고, 성자 예수의 정체와 사역이 성부와 밀접하게 관계하고 있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을 아는 것과 성자 하나님을 아는 것은 본질적으로 같은 지식이고 성부 하나님을 믿는 것과 성자 예수를 믿는 것도 본질적으로 같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 순서는 틀림없이 정해져 있습니다. 성자 하나님을 아는 것이 성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우선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성부의 품속에 었던 독생자 예수가 성부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으로 세상에 계시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창세를 말하여야 십자가를 말할 수 있다고 말하는 전도론이 있지만 아닙니다. 창조를 말하기 위해서 잡다한 유사과학을 들이대지만 그것이 변증의 노력은 될지언정 하나님을 드러내는 인격, 그리스도의 증거는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믿음은 예수의 구원의 창을 통해 들어간 다음에 믿어지는 것입니다. 창조를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믿을만 한 것이라고 여겨졌다고 해서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의 선언, 즉 예수의 증거로 성부를 계시하고 성령을 증명해야 합니다.

 

교회사에서 예수가 누군인가에 대한 논란은 끊긴 적이 없고 그 논란은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진술은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예수 안에 생명이 있고 이 예수를 믿을 때 사람들은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 요한의 명확하고도 간절한 목적입니다.

 

교회사의 이단들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거나 인성을 부정했습니다. 예수의 신성 혹은 인성을 부인한다는 것은 역사적 예수를 부정하거나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요한복음은 역사적 예수와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으로 역사 속에서 살았던 그분이 곧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시며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것이 요한복음의 명확한 메시지입니다.

 

요한복음의 성령 인식도 조금 다릅니다.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에서 나타나는 역동적인 성령의 사역과 요한복음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사역은 다릅니다. 요한복음안에서 성령은 거듭나게 하는 영이고, 생수의 강 같은 영이며, 보혜사이며, 또한 진리의 영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성령은 인격체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귀신 들린 사람을 치유하는 사건이 없습니다. 요한복음에는 기적이 몇 번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의 중요한 메세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건과 현상으로 드러나는 기적이 아니라 그분의 하나님되심이며 성령의 인격성입니다.

 

요한복음은 1장에 들어가자마자 이른바 로고스 찬양시라는 부분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첫 시작인 동시에 전제가 되어서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창조 전부터 선재하셨다는 신론과 기독론을 선언하면서 요한복음은 시작합니다. 2박3일간 휴가를 받았습니다. 묵상은 쉬지 않겠습니다만 포스팅은 잠시 쉬겠습니다. 쉬지 못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과 평화의 시간을 보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