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4:14-20

1930년대 미국 경제대공항을 배경으로 했던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는 자본의 착취와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 안에서 인간의 존엄과 사랑의 실천을 호소하려 했던 작품이다. 작가는 오늘 본문인 요한계시록14장에서 「분노의 포도」라는 제목을 가져왔다. 주인공은 자본의 횡포에게 삶의 자리를 빼앗기고 지주와 은행의 채무독촉에 시달려야 했다. 새로운 희망 서부 캘리포니아로 향해 길을 떠나지만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캘리포니아도 그 장미빛 기대와는 달랐다. 냉엄하고 절망적인 현실에서 주인공 일가는 폭풍우를 피해 헛간으로 피신한다.

그 헛간에 한 노인 부자가 피신해서 들어온다. 노인은 병에 걸려 있었고 이미 엿새나 굶은 상태였다. 자본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의 고통은 냉혹했다. 노인의 아들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먹을 것의 자비를 구했다. 그러나 헛간 안에도 먹을 것은 없었다. 헛간 안에는 슬프게도 아기를 사산하고 몸이 회복되지도 않은 로저샨이라는 젊은 여인이 있었다. 사산한 아기의 엄마는 자신의 엄마에게 동의를 구하고 낮설고 병든 노인에게 자신의 젖을 물린다. 노인이 놀라 거부했지만 노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젖꼭지를 노인의 입에 물리고 기어이 노인의 생명을 구한다. 이 노출과 접촉에서 에로시티즘은 찾아볼 수가 없다. 자본의 논리와는 이질적인 인간성의 엄숙함만이 살아나온다.

14:19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14:20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존 스타인벡이 말하려고 했던 포도즙틀에 밟힐 그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은 누구를 향한 것일까? 자본일까? 아니, 자본에게는 죄가 없다. 죄는 자본에 집착하여 탐욕스러워진 인간의 마음에 있을 것이다. 정당한 방법으로 자본을 축적하는 것을 죄라고 할 수 없을테지만 결핍으로 인해 노인이 아기 엄마의 젖을 얻어먹어야 한다면 자본을 한 곳에만 축적한 인간에 대해서는 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죽은 아기에게 물렸어야 할 젖을 병든 노인에게 물리고 있는 여인의 인간애가 그것을 역설하고 있다. 자본의 성공 뒤에 인간성의 실패가 있다. 그러나 그 인간의 실패 가운데서도 다시 희망을 가져야는 것은 인간성의 회복 즉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17세기 바로크 작가 루벤스의 「노인과 여인」이라는 그림이 있다. 남자는 노인인데다가 대머리다. 겨우 남은 머리털도 백발이지만 이 노인 또한 젊은 여인의 젖을 물고 있다. 게다가 노인은 발가벗었다. 가히 변태스럽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젊은 여인은 자신의 오른손으로 유방을 받쳐 젖꼭지를 노인의 입에 넣어주고 있다. 자세히 보면 배경은 감옥이고 노인은 쇠사슬로 두 손이 뒤로 묶여있다.

루벤스가 고대 로마의 발레리우스 막시무스가 쓴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이다. 시몬이라는 노인이 감옥에 갇혔는데 밥을 주지 않는 벌이 내려졌다. 시몬은 아사 직전이었고 딸 페로가 그 소식을 듣고 감옥으로 찾아간다. 당연히 음식은 가지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무 것도 가지고 들어가지 못한 딸은 자신의 가슴을 풀어헤치고 젖을 꺼내어 아버지의 입에 물렸다. 딸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품어 안으며 젖을 먹였다. 그림에 등장한 노인과 젊은 여인은 부녀관계였고 루벤스는 굶어 죽어가고 있는 늙은 아버지에게 자기의 젖을 꺼내어 먹여주고 있는 딸을 그렸다.

요한계시록은 환상의 세계를 해석하는 것보다 언어를 정의(定義)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 같다. 16절의 곡식이 익어 거두게 되었다는 것은 구원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과 역사 안에서 곡식이 익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정의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구원이라면 곡식이 익어가는 과정은 구원받을 인간의 인생이 변화해가는 과정일 것이다.

무엇이 큰 포도주 틀에 들어가 밟혀야하는 하나님의 진노인 것일까. 존 스타인벡의 메세지를 참고로 한다면 예수를 믿었으니 구원을 받았다는 입의 말이 아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확인하고, 그 믿음을 세상에서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돈에게서부터 사람에게로 돌아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알곡으로 하늘나라 곡간에 들여지는 것과 진노의 포도주 즙틀에 밟히는 것은 그날에 자신이 스스로 결정할 수 없지만 아직 믿음의 열매가 다 익기 전에, 또는 아직 불의의 포도송이가 다 익어버리기 전에, 오늘 우리는 양자간에 선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