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고린도전서 11:17~26
11: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1:18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11:19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11: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11: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11: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11: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11: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11: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11: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바울의 일관적인 어조는 단호한 책망의 말이지만 한편 일관적인 주제는 공동체 안의 서로에 대한 배려입니다. 다시 말하면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단호한 책망입니다. 교회에 파당이 생긴다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배려는커녕 누군가의 욕심과 교만과 이간질에 의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 의해 교회는 나누어집니다.

 

복음과 공동체는 허술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 안에는 용서와 단호함이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22」라고 책망했는데 무서운 책망입니다. 용서의 복음을 말하는 바울이지만 공동체를 훼방하고 회개 없이 넘어가는 것에 속은 적이 없습니다. 단호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무책임입니다. 사랑과 비겁을 구별해야 합니다.

 

어느 시대에나 빈부의 격차는 있습니다. 고린도도 그랬습니다.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지만 바울은 고린도의 모임을 해로운 모임이라는 독설로 일갈했습니다. 주의 만찬의 날은 성도들이 자기의 먹을 분량을 가지고 모이는 ​포틀럭 파티(Potluck Party)였습니다. 이미 파당을 형성한 부유한 사람들은 좋은 음식과 좋은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취할 때까지 먹고 마셨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럴만한 것이 없으니 주변에서 서성거리다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습니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22」

 

바울만 단호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읽어서 아는 예수님도 단호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이라면 그들의 상을 뒤집고 교회에서 내어쫓았을 것입니다. 돈이 많다는 것은 세상에서 자랑할 만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교회 안에서 명함을 자랑하려고 한다면 교회에서는 미숙아입니다. 그들은 당연히 교회의 식사와 교제를 위해서 더 많은 재정을 담당했어야 옳습니다. 그것에는 자율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고 양심과 상식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립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주의 만찬은 예배 후의 식사가 아닙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성찬과 애찬이 구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부자들은 취할 때까지 마시고 가난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돌아갔던 그 모임은 성찬식이었습니다. 주의 날에 주의 피와 살을 범하는 죄를 범한 것이 아닙니까. 그들은 바울의 경고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고린도전서를 읽으면서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jgfcnBxA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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