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고린도전서 13:1~7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13: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주일예배 설교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장」이었고 아침묵상은 고린도전서의 「은사장」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은사를 다루고 13장에서는 사랑을 다룹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아닙니다. 은사의 연장선에서 사랑이 나왔습니다. 사랑을 더 큰 은사라고 말한 것은 모든 은사의 동기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은사를 언급한 것도 문제 많은 고린도 교회에서 배려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은사는 교회를 시작하게 하는 힘이었고 에베소서의 은사는 교회를 구성하는 구조였다면 고린도 교회에서 은사를 가르치는 목적은 통합입니다. 통합을 위해서 모든 역할에 사랑의 동기를 가질 것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어제 주일학교 설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실패한 베드로에게 찾아와서 하신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목양의 사명을 맡기시면서 세 번 반복하여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 양」을 먹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은 예수님에 대한 것이고 그 안에서 예수님의 「내 양」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을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라고 바꾸어서 읽어보면 의미는 더 분명합니다. 한 번 그렇게 읽어보십시오.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13: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13:4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은 오래 참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저는 이번 봄에 오래 참지 못했고 온유하지 못했고 무례히 행하고 성내며 살았기 때문에 이 본문에 대해서 말하기가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아닌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으로는 그것을 지켜낼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더 알아가고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는 분량만큼 사랑은 더 커지고 넓어질 것입니다. 사랑은 믿음에 따른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OenbDExl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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