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누가복음 22장 54~62
22:54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쌔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22:55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22:56 한 비자가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22:57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22:58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가로되 너도 그 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22:59 한 시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가로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22:60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22: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22: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사람은 불행하게도 부정적인 기억을 오래동안 가지고 삽니다. 시간이 지난 뒤에도 과거의 위험했던 일을 기억하고 아찔한 감정을 떠올리기도 하고, 실패했던 기억, 누군가에게 비난받은 것, 수치스러웠던 기억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면서 두고두고 괴로워합니다. 정신의학에서 자기방어를 위해서 뇌가 작동하는 기본원리를 「생존지향성(survival orientation)」이라고 하는데 부정적인 사건을 오랫동안 기억하는 것은 자신을 방어하여 생존하기 위한 뇌의 전략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정신적인 외상(外傷)이라는 뜻의 「트라우마(trauma)」는 고통이나 충격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가 그와 비슷한 상황이 재현되면 두려워지는 증상입니다. 그것도 자신을 지키려는 생존지향성일 것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트리우마가 없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트라우마라는 말과 적용을 너무 남발하여 매사에 소극적으로 바뀌어가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닌지라는 의심을 자주 합니다.

 

아들러의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에서는 프로이트의 근본적인 사상인 트라우마를 부정합니다. 프로이트는 「당신이 트라우마 때문에 괴로워하지만, 당신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상황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트라우마 운운하는 사람은 항상 상황과 사람 핑계를 합니다. 이에 대해서 아들러는 「삶을 결정하는 것은 트라우마가 아니라 과거의 경험, 특히 부정적인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른 것이다」고 말합니다. 정신분석과 심리학에 대해서는 몇 가지를 인용할 뿐 아는 것이 없지만 분명한 것은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그 사건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에게 교회를 세울 것이라는 사명을 주실 때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고 하셨습니다. 베로드는 땅에서 묶인 것을 이제 땅에서 풀어야 하는 사건을 맞았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예수님이 집권하면 자기들이 요직을 차지하여 내각을 구성하겠다던 제자들은 믿었던 예수님이 힘을 쓰지 못하고 체포되자 혼비백산 도망갔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공범으로 지목되자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세 번 부인하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것을 들은 예수님은 배신당한 슬픔보다 베드로가 짊어지고 살아야 할 자책의 무게 때문에 슬퍼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닭이 울기 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고 베드로의 저주의 말이 끝나자 새벽닭이 울었습니다.

 

육체는 참 약합니다. 베드로는 두려워서 부인했지만, 그 배신이 스스로 고통스러워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했습니다. 베드로는 평생에 이것을 두고두고 괴로워했습니다. 새벽에 닭이 울 때마다 그 일이 생각나 마당에 나가 울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트라우마에 갇히지 않고 그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고 기어이 교회를 세워냈습니다. 베드로가 교회를 세운 근거는 자신의 완전무결, 충성봉사의 믿음이 아니고 죄인을 용서하시고 하나님에게로 부르시는 복음 때문입니다. 울려거든 자기 연민 때문에 울지 말고 복음 때문에 울어야겠습니다. 실패하지 않고 자신에게 좌절하지 않고 육체에게 절망해보지 않고 복음을 알았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거나 착각일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복음이 있고 넘어지는 절망의 때마다 일어날 수 있다는 소망은 함께 주어져 있습니다. 나의 믿음의 근거는 내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Uaf7OyfxWk

답글 남기기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Post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