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결정의 윤리

「임신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제한하고 있어 침해의 최소성을 갖추지 못했고 태아의 생명보호라는 공익에 대해서만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우위를 부여해 임신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침해했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소원에 대한 판결의 한부분이다. 헌재는 낙태죄에 대해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고 2020년까지 법 조항을 개정하라고 명령했다. 낙태죄를 둘러싼 논쟁은 두 인권에 대한 입장의 차이이다. 인간으로서의 태아의 생존권을 보장해야 할 것인가, 사회적…

베드로의 슬픔

베드로의 슬픔 마태복음 26:67-75 지난주에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던 예수님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두렵고 고통스러운 길이었는지, 오늘은 또 한 명의 인물 베드로를 통해서 십자가의 길을 다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던 중에 체포되었고 예루살렘 성문을 통과해서 가야바 대제사장의 관저로 들어갔습니다. 그 길에서 제자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불과 몇 분전에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할 때 제자들은…

「The Denial of Saint Peter」 ペテロの否認・베드로의 부인

「ペテロの否認、The Denial of Saint Peter」、カラバジョは告発する女性とかぶとを被った軍人の前に立っているかわいそうな姿のペテロを描いた。軍人の裾一部と女性の片側の顔をくぐって出てきた光が、ペテロの悲惨な顔を照らしている。光が照らすその向こうには、イエスさまが兵士たちに頬を打たれていたものであろう。詳しく見てみると、ペテロの目元に涙が溜まっていて口は塞がらないまま開いている。 ペテロは、イエスさまを否認した。イエスの一派と思われ、捕えられるのを恐れていたからである。それと同時にペテロはもう一つの恐れが重くのしかかっている。自分が生きるために、イエスさまを否認しなければならない悲しみであった。価値がないから裏切ったわけではない。裏切りたくなかったが、弱い肉身が裏切りに勝てなかった悲しみであった。聖書は、ペテロが臆病であったということを告発し、それを非難しようというものではない。私たちがどれだけ弱い存在なのか、思い起こしているのである。イエスは自信に満ちていたペテロに預言した。「今夜、鶏が鳴く前に、あなたは三度、わたしを知らないと言います。」そのためか、カラバジョの絵ではペテロの三本の指は自分の肺を奥深く刺している。 イエスさまの預言にもかかわらず、ペテロは、自分の信仰の熱心によって裏切らないで済むことはできただろうか?そうではない。ペテロにおいてまだ福音の整理は不完全である。いや、今こそ福音の教育が始ったいるのである。イエスさまはもはや弟子たちを集めて講義することはないが、福音の授業はこれから始まる。ペテロは信仰があったがゆえにさ迷い、献身したがゆえに漂流した。しかし、そのさ迷いと漂流が辿り着いたのは、イエス・キリストが十字架と復活をもって完成された福音である。自信満々であったペテロは、この痛みの時間を通して、神の愛はどんなに大きなものであり、人間はどんなに悲惨な存在なのかに気付く。 信仰の豪気では、肉体に打ち勝つことはできない。福音の力は、人間の熱心ではなく、十字架と復活の完成から始まる。使徒の宣教は、義理ではなく、聖霊が臨まなければ始まらない。自信満々のペテロは、「今夜、鶏が鳴く前に、あなたは三度、わたしを知らないと言います。」という言葉を流して聞いたが、謙虚になったペテロは、「聖霊があなたがたの上に臨まれるとき、あなたがたは力を受けます。そして、エルサレム、ユダヤとサマリヤの全土、および地の果てにまで、わたしの証人となります。」と言われたことを心に刻んだ。ペテロが福音の献身の上に立ったのは、キリストの送られた聖霊が臨まれてからである。 放蕩して暴力的であったローマの天才画家、カラバジョは殺人を犯した後、逃亡者となった教皇に、絵と手紙を送って赦免を求めるのであるが、 「ペテロの否認」はカラバジョが死んだ年、つまり逃げまわるうちに描いた最後の作品である。初代教皇ペテロも罪を犯したということを教皇に訴えているのだろうか?それとも、福音を知る前の悲惨な自分の姿を描いたのだろうか?聖霊が十字架と復活の福音を悟らせない限り、カラバジョの絵で泣いているペテロの姿はまさに私たちの肖像画ではないだろうか。   「베드로의 부인、The Denial of Saint Peter」, 카라바조는 고발하는 여인과 투구를 입은 군인 앞에서 한없이 약해져 있는 가여운 모습의 베드로를 그렸다. 군병의 옷자락 일부와 여인의 한쪽 얼굴을 뚫고 나온 빛이 베드로의 비참한 얼굴을 비추고 있다. 빛이 비치는 그 건너편에는 예수님이 군병들에게 뺨을 맞고 있었을 것이다.…

르호봇을 향해서

창세기26장에는 이삭이 기근을 당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서 약속의 아들인 이삭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난민의 길을 떠나게 된다. 약속의 땅에서 약속의 아들이 난민이 되어 길을 떠나야 하니 그 약속이라는 것이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가는 길에 블레셋 땅 그랄을 지나는데 하나님은 그곳에서 이삭을 애굽으로도 가지 못하게 막으셨다.   배고픈 이삭은 궁여지책으로 남의 땅을 빌려…

1/4분기 결산

자동차의 연료가 소모되면 가솔린을 주유하고 휴대폰의 배터리가 소모되면 충전한다. 소모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면 충전하고 싶은 부담이 생기기 마련이다. 일 년의 4분의 1, 1/4분기가 지나간다. 일 년의 배터리 중에 25%를 이미 사용한 것이다. 배터리 잔량은 75%, 충전의 습관대로 카렌더에 충전기를 갖다 대 보아도 시간은 충전되지 않는다.   계절은 언제나 마음보다 빠르다. 마음은 아직 겨울인데 3월마저도 과거가…

신존재 증명

나는 가끔 생각한다. ‘나는 왜 하나님을 믿었을까?’ 믿음의 세계에서는 비웃음을 당할만한 말이다. 회심에 관해서는 언제나 ‘나는 왜 하나님을 믿었을까’ 가 아니라 ‘나는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는가’ , 즉 믿음은 어떠한 경위로 주어지는 것이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진지한 호기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실망스러운 대답일지도 모른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믿느냐고 물었는데 이래저래 해서 하나님을…

새내기 목사의 빈들

이곳에 묵상이나 작은 생각들을 써 볼 생각입니다. 읽고 생각하고 쓰는 것에 좀 더 성실하고자 합니다. 방 이름은 칼럼이라고 되어있지만 「새내기 목사의 빈들」이라는 별명을 붙여봅니다. 새내기 목사라고 한 것은 2019년 3월에 목사안수를 받은 신참 목사이기 때문이고, 빈들이라고 한 것은 「생각」,「통찰」,「분별」을 뜻하는 히브리어의 「빈」이라는 글자를 빌려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풋내기 목사의 어쭙잖은 생각들」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개인적…

牛とライオンの愛の物語・소와 사자의 사랑 이야기

牛とライオンの愛の物語 ー姜旲憬神学生ー ライオンと牛がいました 二人は熱く愛し合っていました 互いに最善を尽くすことを約束しました ライオンは牛のために肉をあげ 牛はライオンのために草をあげました 牛はライオンを愛していたので 食べられない肉を我慢して食べ ライオンは牛を愛していたので 食べられない草を我慢して食べました 最初は何とか食べましたが 結局二人は我慢の限界に達して別れてしまいました 別れ際に二人はこう言いました 牛が言いました「私は最善を尽くした」 ライオンも言いました「私だって最善を尽くした」 (パク ヘジョ)   この話は寓話です。当然本当の話ではありません。人間関係において自分の固定観念を相手に押し付けてしまうことがあってはいけないと言っています。しかしなぜライオンと牛はお互い分かり合うことができなかったのでしょうか。相手を心から愛し、最善を尽くした二人は、相手に愛ではなく、毒を与えてしまいました。私は思います。この二人は相手のことを見ていなかったのではないか、自分の愛、自分の最善ばかりに気を取られ、一番大切な相手のことを見失っていたのではないかと。ただ実際に私たちも神様との関係において、このような過ちを犯していないでしょうか。神様に私の最善のものを献げていると思っても、実際はライオンに草をあげ、牛に肉をあげるようなことをして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もう一度神様のことを見てみましょう。神様が好きなもの、神様が嫌いなもの、神様が何を望んでおられるのかを見てみましょう。私たちは神様を見続けなければ、この牛とライオンのように、相手に毒を与えてしまう愚かな存在なのですから。カインは「私は最善を尽くしました」と神様に顔を伏せましたが、アベルは神様に受け入れられるささげものを献げました。私たちは今どちらに生きているのか自問自答して、神様を見上げるとともに私たちの信仰をもう一度見つめ直す必要があると思うのです。その時に初めて私たちは謙遜な者へと変えられます。「私は最善を尽くしました」と言えるのは、実は人間ではなく、神様だけなのです。   소와 사자의 사랑 이야기 ー강대경 신학생ー 사자와 소가 있었습니다. 둘은 서로 죽도록 사랑했습니다.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하였죠. 사자는 소를 위해서 ‘고기’를 주었고 소는 사자를 위해서 ‘풀’을 주었습니다. 소는 사자를 사랑했기 때문에 ‘못 먹는 고기’를 고통을 이겨내며…